기념물/부산광역시 4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1호_동래남문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1호 _ 동래남문비 (東萊南門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2.06.26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 (대연동,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충렬(忠烈)을 기리어 당시의 격전지인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에 세웠던 비로, ‘동래충렬비’라고도 부른다. 현재 비는 받침돌 위에 크게 훼손된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그 위에 얹었던 머릿돌을 옆에 따로 놓여 있다. 비문에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음날 싸움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일, 병사 이각의 비겁한 도망,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연한 죽음과 비장 송봉수·김희수·향리 송백·교수 노개방·유생 문덕겸·양통한의 순절, 양산군수 조영규의 절의 등 왜병들과의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_척화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 _ 척화비(斥和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2.06.26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 (대연동,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시 대 : 조선 1874년 척화비는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은 흥선대원군이 서양 강대국의 침략에 대한 백성들의 경계심을 드높이고자 고종 8년(1871) 서울과 전국의 주요 지역에 세운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和親)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라는 강한 경고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조선이 서양 강대국과 국교를 맺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2호_사처석교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2호 _ 사처석교비 (四處石橋碑) 수 량 : 1기 지정일 : 2001.10.17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 (대연동,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시 대 : 조선 정조 5년(1781) 동래부사 이문원의 기부금과 동래부 유지들의 모금을 바탕으로 동래부의 남문 밖에 있던 네 곳의 나무다리를 돌다리(石橋)로 바꾼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원래 동래고등학교 앞 길가에 있던 것을 도로확장공사로 인하여 금강공원 안의 임진동래의총 입구에 옮겼다가 그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긴 것이다. 나무다리는 1∼2년마다 다시 고쳐 쌓게 되는데 그때마다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다. 이에 강위성이 지역 주민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고 박도유..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7호_약조제찰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7호 _ 약조제찰비 (約條製札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2.06.26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 (대연동,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조선 숙종 9년(1683)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이 쓰시마섬주와 왜관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처리를 놓고 5개 조항에 달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와,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직사각형의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비문의 내용은 첫째로, 출입을 금한 경계 밖으로 넘어 나온 자는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린다. 둘째, 노부세(路浮稅:통행 수수료)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면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셋째, 시장을 열었을 때 각 방에 몰래 들어가 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