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시도민속문화재 57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17호_쌍조석간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17호 _ 쌍조석간 (雙鳥石竿) 수 량 : 1기 지정일 : 1983.08.24 소재지 : 전북 부안군 계화면 대벌리 413번지 시 대 : 조선 영조 25년(1749) 대벌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높이 360㎝의 돌기둥으로, 이 마을의 당산이다. 당산은 신이 있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이 지방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풍농·풍어 등을 기원하고, 병과 재앙을 막아주며, 자손의 번창을 도와주는 마을 공동신이 되고 있다. 굵직한 돌기둥 위로는 두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새를 얹어 두는 것은 새의 활동영역이 하늘·땅· 물 등으로 광범위하여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믿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초사흗날 밤에 성대하게 거행되는데, 당산에 멍석으..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2호_호서 옥마산 김부대왕지기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2호 _ 호서 옥마산 김부대왕지기 (湖西 玉馬山金傅大王之旗) 수 량 : 1기 지정일 : 2012.02.10 소재지 : 충남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 지석굴마을 시 대 : 조선시대 헝검에 호서옥마산김두배왕지기(湖西玉馬山金傅大王之旗)라고 씌어진 기(旗)는 1830년대 제석리 지석굴 마을에 살던 김국서의 꿈에 상자가 나타났고, 이튿날 바닷가 독살에 고기잡이를 나갔다 밀물에 떠밀려온 상자속에 경순왕의 위태, 왕기, 그릇 등이 들어있어 당집을 짓고 보관하였다고 전해짐. 가로 4m, 세로2m의 기에 가로에 “조선국”, 세로에 “湖西玉馬山金傅 大王之旗”라로 씌어 있으며 기의 가장자리를 청색으로 물들여 요철을 두었으며 기가 들어 있던 상자에는 “道光十二年 壬寅九月初吉日 金傅大王之旗”라고 기록되어 있..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6호_보령 독산리 독살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6호 _ 보령 독산리 독살 (保寧獨山里독살) 수량/면적 : 1식 지정일 : 2000.09.20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 758-1 공유수면 ◦ 보령지방의 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예부터 갯벌에 살을 매어 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가 많이 행해졌음. 그중 갯벌에 돌로 담을 쌓아 만든 살을 독살이라하며, 독산리에는 10곳의 독살이 있었는데 모두 훼손되고 이 곳 독살만이 형체를 유지하고 있음. ◦ 원래 2개였던 독살이 하나로 통합된 형태로 북쪽 날개의 길이는 70m 정도이고 남쪽의 날개는 100여m 정도임 보령 독산리 독살 표지판 보령 독산리 독살 (保寧獨山里독살) 보령 독산리 독살 (保寧獨山里독살) 보령 독산리 독살 (保寧獨山里독살) 보령 독산리 독살 (保寧獨山里독살)..

세조가 마곡사에 올 때 타고 온 가마, 세종대왕 연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4호 _ 세조대왕연 (世祖大王輦) 수 량 : 1점 지정일 : 1986.11.19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소유자(소유단체) : 마곡사 연(輦)은 임금이 거동할 때 타는 가마를 일컫는 것으로, 이 가마는 조선 세조가 마곡사에 올 때 타고 온 것이다. 4명이 들 수 있도록 한 긴 멜대 위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사각형의 몸체를 올리고 지붕을 덮은 모습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파손된 부분도 있고 채색도 희미한데,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하다. 마곡사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세조가 매월당 김시습을 찾아 연을 타고 이 절에 왔다가 매월당이 떠나고 없는 것을 알자, ‘김시습이 나를 버리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하며, 타고 왔던 연을 ..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1호_서산 김동진가옥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1호 _ 서산김동진가옥 (瑞山김동진가옥) 수량/면적 : 1괄 지정일 : 2005.10.31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가구전길 49 (고북면) 고북면 가구리에 위치하고 있는 김동진 가옥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와 21칸 규모의 한식목조로 된 창고채, 블록조의 창고건물이 있으며, 토담이 전체 대지를 둘러싸고 있다. ㄴ자 평면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좌측으로 치우쳐 사랑채가 있으며, 그 뒤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에 중문채가 사랑채와 붙어있어며, 1칸의 대문간으로 출입할수 있다. 중문채 밖으로 담장과 연결된 쪽문과 창고채가 있다. 원래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된 ㄷ자형 평면이었다고 한다. 안채는 1972년 건물이 축소되었다고 하며 중문채에 부속되었던 곳간은 소실..

한옥기법과 일본식 건축기법이 어우러진 청양 윤남석가옥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8호 _ 청양 윤남석가옥 (靑陽 尹男石家屋) 수량/면적 : 1곽(3,670㎡) 지정일 : 2002.08.10 소재지 : 충남 청양군 장평면 장수길 13-8 (미당리) 청양 윤남석 가옥는 안채·사랑채(큰 사랑채)·별채(작은 사랑채)·행랑채·곳간 등으로 구성된 조선 후기에서 1900년 초에 건축된 고택이다. 그 중 정면 5칸·측면 3칸에 전면으로 한칸 덧달아 낸 사랑채(큰사랑채)는 윤남석의 고조부가 지었다. 그리고 정면 9칸·측면 3칸의 안채와 정면 5칸·측면 3칸에 4면으로 반칸씩의 퇴를 돌린 별채(작은 사랑채)는 윤남석의 부친인 윤갑선이 1937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2층으로 건립한 별채는 우리나라 전통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건축기법을 보여주는 특이한 건물이다. 또..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5호_청양 임석주 가옥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5호 _ 청양임석주가옥 (靑陽 林錫周家屋) 수 량 : 2동 지정일 : 2009.10.20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덕평길 27-11 (화성면) 시 대 : 조선후기 민가 가옥 화성면 기덕리는 평택임씨 집성촌으로 주변에는 재실이 있으며 지정건물과 맞대어 임찬주가옥이 위치하고 있음. 건립년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1900년대초 임석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호가 ‘송운’으로 송운고택이라고도 불리움. 안채 등 건물구조, 양식은 물론 담장 등 전통양식이 비교적 원형유지⋅관리가 잘 되고 있어 도 민속자료로 지정 청양임석주가옥 표지석 청양임석주가옥 사랑채 임석주가옥 사랑채 임석주가옥 사랑채 청양임석주가옥 별채 임석주가옥 별채 임석주가옥 별채 청양임석주가옥 안채 임석주가옥 안채 임석주가옥 안채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85호_윤탕신 목패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85호 _ 윤탕신 목패(尹湯臣 木牌), 복제품 수 량 : 1점 지정일 : 2016.05.09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신풍1리길 25 (지보면) 시 대 : 1626년 윤탕신 목패(尹湯臣 木牌)는 윤탕신의 신분, 거주지, 성명, 출생연도, 충의위 소속시기, 제작시기 등의 인적사항을 담고 있다. 기존의 패들과 비교할 때 형태, 문구의 형식과 내용, 낙인의 위치와 방법, 머리 부분의 모양 등에서 매우 독특하여 사료적 가치가 크다 윤탕신 목패(尹湯臣 木牌), 복제품 _ 조선, 1626, 파평윤씨 죽호고택 윤탕신 목패((尹湯臣 木牌)는 1626년(인조 4) 제작된 충의위소속 윤탕신(尹湯臣, 1584~1656)의 호패로,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호패법은 조선 초기..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_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 종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 _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 종택 (安東 黙溪書院 및 寶白堂 宗宅) 수 량 : 3동 1식 지정일 : 1980.06.17 소재지 : 경북 안동시 길안면 충효로 1736-5, , 735-1 (묵계리) 묵계서원은 응계 옥고(1382∼1436) 선생과 보백당 김계행(1431∼1517) 선생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숙종 13년(1687)에 지었으나, 고종 6년(1869) 서원철폐령 때 사당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는 마루를 깔고 양 옆에 온돌을 설치한 일반적인 형태를 보인다. 서원 왼쪽으로는 이 서원을 관리하는 ㅁ자형의 주사가 위치한다. 묵계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종택..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31호_조경묘출토유의일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31호 _ 조경묘출토유의일괄 (趙儆墓出土遺衣一括), 조경묘 철릭, 복제품 수 량 : 일괄(26건 31점) 지정일 : 2002.08.16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2-1번지 서울역사박물관 시 대 : 조선시대 趙儆(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과 함께 幸州 山城에서 大捷을 거두어 한양 탈환의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壬亂 이후로는 漢城府 右尹과 漢城府 判尹을 역임하였고, 선조 37년(1604)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공적을 인정받아 宣武功臣 3等에 책록되고 풍양군(豊壤君)에 봉하여진 바 있다. 趙儆의 분묘에서 출토된 本 遺衣들은 墓主의 생몰 연대가 임진왜란 전후인 바 전반적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의 과도기적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러한 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