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기념물 15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7호_강화 정족산사고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7호 _ 강화 정족산사고지 (江華 鼎足山史庫地) 면 적 : 94.22㎡ 지정일 : 2014.04.16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44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

강화도 덕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4호_강화 망산봉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4호 _ 강화 망산봉수 (江華 望山熢燧) 면 적 : 3,074㎡ 지정일 : 2011.12.28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 131 봉수(烽燧)는 횃불인 봉(烽)과 연기인 수(燧)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통신 방법으로 조선시대까지 쓰였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냈다. 대개 봉수는 해발 100m~300m의 너무 높지 않은 산 정상부, 주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됐다. 망산봉수는 덕산봉수라고도 불린다. 덕산은 해발 240m이다. 조선 초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별립산 봉수로 전달했고, 조선 후기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교동 화개산 봉수로 전했다. 망산봉수는 사방 8.3m 내외의 정방형 기단에 원형 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4호_천제암(궁)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4호 _ 천제암(궁)지 (天祭菴(宮)址) 면 적 : 1,025.2㎡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64-2번지 천제암궁지는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사그릇(제기)과 제사물건(제물)을 준비하던 재궁(齋宮)이 있던 곳이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시를 쓴 현판이 있었고,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를 지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천제암궁터는 삼단의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넓이는 약 70평 정도로 부근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 금표와 우물들이 남아 있다. 『여지도서』등 옛 문헌에는 ‘천재암(天齋庵)..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7호_보문사 향나무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7호 _ 보문사 향나무 (普門寺 香나무) 수량/면적 : 1주 / 85.1㎡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1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보문사의 향나무는 보문사 석실(石室) 앞 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7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3.2m 정도이다. 높이 1.7m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동쪽 줄기의 둘레는 1.3m, 서쪽 줄기의 둘레는 1.5m이다. 나무의 형태는 마치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이 보여 기묘한 느낌..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_정제두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 _ 정제두 묘 (鄭齊斗 墓) 면 적 : 694㎡ 지정일 : 2007.02.26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남로769번길 52 (양도면)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이다.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 씨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1649년(효종1년)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나 사퇴하였고, 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잠시 지낸 뒤 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_이건창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 _ 이건창 묘 (李建昌 墓) 수량/면적 : 1기 / 241.5㎡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65-27번지 시 대 : 1898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고종 4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 11년(1874)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고종 12년(1875)..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6호_허유전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6호 _ 허유전 묘 (許有全 墓) 수량/면적 : 1기 / 557.9㎡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산297번지 고려 후기 충숙왕 때의 문신인 충목공 허유전(1243∼1323) 선생의 묘소이다.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년) 출생했으며,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여러 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초에는 가락군에 봉해지고 충숙왕 8년(1321)에 수첨의찬성사를 거쳐 정승에 올랐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6월 묘지 발굴 당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_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 _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甲串나루 船着場 石築路) 수량/면적 : 2개소/1,253㎡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김포군 월곶면 성동리 일원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군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갑곶이란 지명은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침입하자 왕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을 때 이곳이 강 건너와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정묘호란(1627) 당시 인조가 건넜던 나루터로, 병자호란(1636) 때에도 봉림대군이 임금을 모셨던 곳이고, 병인양요(1866)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되었다가, 조선 세종 원년(..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_강화 통제영학당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 _ 강화 통제영학당지 (江華 統制營學堂址) 면 적 : 6,381㎡ 지정일 : 2001.04.02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61 시 대 : 1893년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여겨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총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을 겪은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해군편제로 개편하면서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치령을 공표하고 갑곶진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893년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개교와 함께 W.H.Callwell 등 영국장교들이 교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5호_황형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5호 _ 황형 묘 (黃衡 墓) 면 적 : 2,629㎡ 지정일 : 2013.07.29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 72-1 황형(1459∼1520)은 조선 성종, 중종 때의 무신으로서 자는 언평(彦平),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480년(성종 11)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성종 17)에는 무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라좌도방어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도총관, 지훈련원사,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중종 때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莊武)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