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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향토유적 52

부여군 향토유적 제51호_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부여군 향토유적 제51호 _ 황일호 신도비 (黃一皓  神道碑)및 황진 효자각 (黃璡 孝子閣) 수   량 : 효자각 1동, 신도비 1기지정일 : 2001.01.03소재지 :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58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표지석 황일호 신도비 (黃一皓  神道碑)및 황진 효자각 (黃璡 孝子閣) 황일호 신도비 (黃一皓  神道碑)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 1588~1641)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 황원(黃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대수(黃大受)이고, 아버지는 황척(黃惕)이며, 어머니는 강백룡(姜伯龍)의 딸이다. 큰아버지 황신(黃愼)에게 입양되었다. 조수륜(趙守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음보로 운봉현감·전주판관·임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35년(인조 13) 증..

부여군 향토유적 제142호_부여 황일호 사당

부여군 향토유적 제142호_부여 황일호 사당(扶餘 黃一皓 祠堂) 수   량 : 1동지정일 : 2019.12.20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48-8 외시    대 : 근대   황일호(黃一皓, 1588~1641)는 전주판관 · 임천군수 · 장령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이다. 황일호 사당은 부여읍 가증2리 마을에 위치하는데, 황일호의 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가 사당의 후면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의 정확한 창건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삼문의 정려 시기가 1919년 9월로 기록되어 있어 사당은 1819년에 창건하고,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부여군 향토유적 제51호)이 현재의 장소로 이건한 1927..

부여군 향토유적 제128호_규암 부산서원

부여군 향토유적 제128호 _ 부산서원(浮山書院) 지정일 : 2015.10.30소재지 : 충남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산3-3시    대 : 조선 후기 1719년(숙종 4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같은해에 ‘부산(浮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그 뒤 군수 정연달(鄭然達)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에 의해 1980년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쪽 협문(夾門)으로 된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김집과 이경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이 서원에서는 매년 9월 18일에 향사를 지내고 ..

부여군 향토유적 제117호_이사명의 처 가람조씨 및 이희지의 처 연일정씨 정려

부여군 향토유적 제117호 _ 이사명의 처 가림조씨 및 이희지의 처 연일정씨 정려 수    량 : 1동지정일 : 2012.08.28소재지 : 충남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산3-1 이사명의 처 가림조씨 및 이희지의 처 연일정씨 정려는 충청남도 규암변 진변리에 있는 건축물이다정면 2칸(4.2m), 측면 1칸(2.1m)의 3량 가구구조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1722년 영조의 특명으로 세워진 정려는 1908년에 중수되었다. 정려 건축이 가지는 전형적인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정려의 관계자가 조선후기 서인과 노론의 중심에 서 있는 문인들로 그 역사적 가치가 있다.이사명의 처 가림조씨 및 이희지의 처 연일정씨 정려 표지석 이사명의 처 가림조씨 및 이희지의 처 연일정씨 정려각 좌 · 우측면 이사명의 ..

부여군 향토유적 제13호_부여 조왕사 석탑

부여군 향토유적 제13호 _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수    량 : 1기지정일 : 1995.06.01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0-3시   대 : 조선시대 1987년 7월 23년 폭우로 인하여 노출되어 발견되었다.고려시대 석불(금성산 석불좌상)이 현존한 사찰에서 발견된 석탑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다.부여 조왕사 석탑 표지석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부여 조왕사 석탑(扶餘 朝王寺 石塔) 2025.03.2..

부여군 향토유적 제126호_석성 전득우 재실

부여군 향토유적 제126호_석성 전득우 재실 수   량 : 1동지정일 :  2015년 10월 30일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786-1시    대 : 근대소유자 : 남양전씨부윤공휘득우파종중 전득우(田得雨)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전주(田柱)이다. 부인은 정씨(鄭氏)이고, 아들은 판중추원사 전흥(田興)이다. 전득우는 고려 말 부여에서 태어났다. 조선 초 형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자세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석성 전득우 재실 전경 석성 전득우 재실 전득우 재실의 건물규모는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석성 전득우 재실인 추원재(追遠齋) 현판 석성 전득우 재실 석성 전득우 재실 석성 전득우 재실 좌 · 우측면 석성 전득우 재실 후면 석성 전득우 재실 후..

전좌바위 절벽의 작은 정자, 두암초당

고창군 향토유적 제10호_두암초당(斗巖草堂) 수    량 : 1동지정일 : 2020.06.23소재지 :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산126 두암초당은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 했던 호암 변성온(壺巖 卞成溫, 1530~1614)관 인천 변성진(仁川 卞成振 )형제의 지극한 효성을 기억하려고 후손들이 지은 정자이다. 초당 가까이에 부모 묘소가 있다. 초당은 전좌바위 또는 두락암( 곡물이 되는 데 쓰는 기구를 덮어씌운 바 )이라 불리는 바위 밑을 조금 파고 그 안에 구조물을 끼워서 지은 누정이다. 요즘은 보기 드문 바위 굴 누정이다. 창건 이후 훼손되었으나 5대손인 변동빈이 1815년에 중건한 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초당에는 이재 황윤석, 노사 기정진 등 이름난 인물들의 시와 현판, 중건기(보수하거나 고쳐지은..

청양군 향토유적 제 14호_금정역지

청양군 향토유적 제14호 _ 금정역지(金井驛址) 지정일 : 2018.01.12소재지 :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320시    대 : 조선시대 금정역지는 금정역(金井驛)이 있던 역 터이다. 역(驛)은 공무 중인 관리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중요한 공문서 및 군사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했던 곳이다. 이러한 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전국적인 규모로 역이 설치된 것은 고려시대이고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한양을 기점으로 역로망을 발전시켰다.조선시대에도 충청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는데 금정도(金井道)는 우도에 속한 대표적인 역도(驛道)로 금정역을 포함하여 9개 역을 관할하였다. 금정도는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는데, 1614년(광해군 6)에는 충청우도 중 '시흥도'를 통합하면서 현재의 화성..

당진시 향토유적 제1호_면천 군자정

당진시 향토유적 제1호_면천 군자정(沔川 君子亭) 지정일 : 1993.05.21 소재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산리, 영랑효공원 시 대 : 1803년 군자정은 연못인 군자지 가운데에 위치한 정자로, 고려 충렬왕때의 지군사인 곽충령이 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염계의 애련설을 따라 못의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 위키백과 - 면천 군자정 표지판 면천 군자정(沔川 君子亭) 고려 공민왕 2년(서기 1352년) 지군사 곽충룡이 관아 동쪽 은행나무 아래에 연못을 수축하였고 그 후 1803년 면천군수 유한재가 연못가운데 원형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8각정을 짓고 연못에 연꽃을 심었는데 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아니하고 군자와 같아서 군자정이라 하였다 한다. 군자정으로 건너는 돌다리는 자연석 네 개로 구성 되었..

보령시 향토문화유산 제3호_윤자운 사우

보령시 향토문화유산 제3호_윤자운 사우(尹子雲 祠宇) 수 량 : 1동 지정일 : 1991.12.10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 산37-1 이 사우는 병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도공 윤회와 영의정을 지내고 무송부원군에 봉해진 문헌공 윤자운을 제향하는 사우이다. 원래 이 사우는 성종25년(1494)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홍죽리에 건립되었으나, 그 곳에 사는 윤자운의 후손들이 괴학하여 관리가 부실해짐에 따라 1725년 웅천읍 소황리 지역에 사는 윤자운의 후손들이 위패를 모셔다가 웅천 소황리에 재건립하였다. 그러니 소황리에 군사시설이 들어거면서 현 위치로 옮겨졌다. 윤자운 사우 표지판 윤자운 사우 전경 신도비. 효자비. 공적비, 사적비 좌) 茂宋府院君史蹟碑(무송부원군사적비) 우) 崇祿大夫議政府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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