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향토유적 44

평택시 향토유적 제6호_원릉군 원균 장군 사당

평택시 향토유적 제6호 _ 원릉군 원균 장군 사당 수 량 : 1동 지정일 : 1991.07.11 소재지 :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84 본 사당은 도일리에 대대로 살아온 원주 원씨 문중의 인물인 명장 원 균(1540~1597)을 모신 곳이다. 원균장군은 조선 선조때 명성이 높았던 무관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시 삼도수군 통제자로 임하여 전사한 장군이며 전한 후 선무공신 1등에 책훈되었던 분이다. 선조 임금이 원균장군의 사후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로 증직을 내렸고 사당을 세워 후손에게 제향하도록 하여 오늘에 이르는 사당은 경기도 지방 기념물 제57호인 묘역앞에 있었으나 물이 나고 낡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것이다. 원릉군 원균 장군 사당 ..

안성시 향토유적 제24호_안성 칠장사 사적비

안성시 향토유적 제24호 _ 안성 칠장사 사적비(安城 七長寺 事蹟碑) 지정일 : 1986.05.22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 입구 약 150m지점 당간지주 옆에 위치한 화강암 비석으로, 1671년(현종12)에 건립되었고, 높이 2.2m, 가로 1.06m, 폭 0.27m의 자연암반(220cm×150cm×90cm)위에 세운 비신에는 과 〈대명 숭정 44년 신해 6월 일입 大明崇禎四十四年 辛亥六月 日立〉이라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시주, 화주자의 이름들이 음각되어 있다. 숭정 44년은 1671년(현종12)에 해당되고, 사적비는 자연암반 상면에 비공을 파고 세웠으며, 이수를 갖추지 않고, 상면은 둥글게 처리한 형태로 비문이 노출되어 있다. 칠장사에서 묵서의 사적기가 없기 때문에, 이 사적..

안성시 향토유적 제18호_안성공원 삼층석탑

안성시 향토유적 제18호 _ 안성공원 삼층석탑(安城公園 三層石搭) 수 량 : 1구 지정일 : 1986.05.22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5, 낙원역사공원 내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이 탑은 갑석과 삼층의 탑신부만 남아 있으며, 안성 시내 주변에서 각 부재를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탑의 중적 부재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존이 양호하다. 원래는 기단석과 지대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시멘트 지대위에 석탑을 건립해 놓았다. 1층 탑신석 남쪽 면에는 문비의 흔적이 있으며, 나머지 삼면에는 두광과 신광을 갖춘 좌상이 1구식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석에만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2 • 3층 탑신석에는 우주가 없다. 1 • 2층 옥개석의 형식은 같으나 3층 옥개..

안성시 향토유적 제9호_안성공원 석조광배

안성시 향토유적 제9호_안성공원 석조광배(安城公園 石造光背) 수 량 : 1구 지정일 : 1986.05.22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5, 낙원역사공원 내 화강암 1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원래 석남사 주변에 출토된 것을 수습하여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두광과 신광을 갖춘 보주형(寶珠形)의 거신광배(巨身光背)로서, 주변에는 화염문(火炎文)이 돌려져 있고, 정상에는 큼직한 화불(化佛) 1구가 조각되어 있다. 두광(頭光)은 이조선(二組線)의 원형 내에 운문(雲紋)이 있으며 그 중심부에 원좌(圓座)가 있고 간지(間地)에 8판의 연화문이 있다. 신광(身光)에는 간지에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 조각되어 있다. 광배의 높이는 110cm, 중심 폭은 102cm의 규..

안성시 향토유적 제8호_안성공원 석불좌상

안성시 향토유적 제8호 _ 안성공원 석불좌상(安城公園 石佛坐像) 수 량 : 1구 지정일 : 1986.05.22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5, 낙원역사공원 내 안성 시내 주변에 있는 석불(石佛) 부재(部材)를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놓은 것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된 흔적이 보이나 보존은 양호한 편이다. 화강석의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갖추었으나 원형인지는 알 수 없다. 광배는 1석으로 조성된 거신광(擧身光)으로 둘레 가장 자리에 화염문(火炎文)이 있고, 두광(頭光)과 원좌(圓座) 주변에 단엽연화문(單葉蓮花文) 12판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밖으로 2중의 테두리로 두광을 갖추었다. 그 간지에 운문(雲文)이 있으며, 신광(身光)의 2조선(二組線) 간지에도 운문이 있고, 광배의 높이는 157cm..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15호_완월루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15호 _ 완월루(玩月樓) 지정일 : 2016.12.28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2136 완월루는 천안 전씨 문중에서 건립한 서당이다. 건축 연대는 1900년경으로 추정된다. 완월이란 아름다운 달을 완성한다는 뜻으로, 누정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평상시에는 인근의 이름난 한학자를 모셔다가 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활용하다가 제향 시에는 재사(齋舍)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강학이나 제사의 기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완월루 표지판 완월루 표지판 완월루 정문 완월루 현판 완월루 완월루 완월루 전경 완월루 천안전씨들이 사용했던 서당으로 건물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너무 낡아 보수가 시급합니다. 완월루 완월루앞 ..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9호_쌍벽루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9호 _ 쌍벽루(雙碧樓) 지정일 : 2016.12.28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산3-3 쌍벽루는 1942년 참봉 전영선(全永鮮)이 건립한 누정이다. 마령면 강정마을을 지나 월운마을로 가는 오른쪽 산허리에 위치하는데, 산이 푸르고 계곡물이 푸르다 하여 이름을 '쌍벽(雙壁)'이라 지었다 한다. 큰 바위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세워졌다. 충량(대들보와 직각으로 이루는 보)이 건물 좌우측의 중앙 칸 기둥에서 뻗어나와 용머리를 대들보에 걸쳐 놓은 형상이다. 용머리는 청룡과 황룡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중앙 칸 천장은 우물 천장(#형의 천장)이고 나머지 부분은 연등 천창(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만든 천장)으로 되어 있다. 단청이 매우 화려한 점이 특징이..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_삼계석문 암각서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 _ 삼계석문 암각서( 三溪石門 巖刻書) 지정일 : 2016.12.28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산21-7 삼계석문 암각서는 *최치원(崔致遠, 857~?) 의 글씨를 탁본하여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계석문(三溪石門)'이라고 쓰인 글씨 우측에 '萬曆十八年庚寅年' 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어 금석학적 가치가 크다. 만력 18년은 1590년(선조 23)이다.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의 "쌍계석문(雙溪石門) 암각서',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의 '삼계석문(三溪石門) 암각서' 와 마찬가지로 최치원을 흠모한 후대인들이 최치원의 글씨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최치원 : 통일신라 말의 문인이자 관료,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이다. 유불선 삼교를 포용해 수용한 사상가이자 현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_삼천서원 묘정비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 _ 삼천서원 묘정비(三川書員 墓庭碑), 우측 수 량 : 1기 지정일 : 2016.12.28 소재지 :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13-15 묘정비는 삼천서원의 건립 경위와 제향 인물의 행적을 적은 비로, 서원비(西院碑)라고도 한다. 삼천서원은 진안군에서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시대에 왕이 서원이 이름을 지어주고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내려준 서원을 말한다. 삼천서원은 안회(顔回),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朱熹), 제갈량(諸葛亮) 등 중국의 선현을 배향하고 그 덕행과 충절을 기리고 있다. 묘정비 앞면 상단에 '삼천서원', 뒷면 상단에 '묘정비' 라는 글자를 새기고, 그 아래에는 삼천서원의 건립 내력을 작은 글씨로 새겨 놓았다. 조선후기 문신 이의현..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_용담향교 공적비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 _ 용담향교 공적비(龍潭鄕交 功績碑) 수 량 : 2기 지정일 : 2016.12.28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2202 공적비는 인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비석이다. 용담향교 공적비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용담향교에 불이 나자 성현들의 위패를 수습하여 주천면 바위굴 속에 보존한 구순, 고계춘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공적비는 모두 2기인데, 오른쪽은 은 구순(具詢), 왼쪽은 고계춘(高啓春)의 비석이다. 비문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화재가 나서 위급한 상황에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성현들의 위패를 지켜낸 두 유생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공적비를 보전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세웠는데, 비각은 사방을 홍살로 두르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