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 사찰 5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_예산 천방사 금동여래좌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_ 예산 천방사 금동여래좌상 (禮山 千方寺 金銅如來坐像) 수 량 : 1구 지정일 : 2010.07.30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27 시 대 : 고려후기 의 육계는 크고 낮으며,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표현되었다. 타원형의 얼굴은 눈, 코, 입 등이 두꺼운 도금으로 인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단정한 인상은 잘 남아 있다. 신체 상체는 어깨가 둥글고 허리는 길고 반듯하며, 하반신은 비록 잘못된 주조로 인해 밑부분이 들떴지만 결과부좌한 다리의 표현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있다. 신체에는 두꺼운 대의를 걸치고 노출된 가슴에는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내의와 군의를 묶는 띠매듭이 표현되었으며, 왼쪽어깨에서 팔꿈치로 떨어지는 옷주름은 삼각형 골주름으로 처리하였다. 안정감 있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_예산 송림사부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_ 예산 송림사부도 (禮山松林寺浮屠) 수량/면적 : 일원 지정일 : 2006.10.30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대률리 산 53-9 시 대 : 고려 초기의 부도로 추정 2006년 10월 3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 예산 송림사 부도는 통일신라 말기 팔각원당형 부도를 계승한 고려 초기의 부도로 추정된다. 예산 송림사 부도는 고려시대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부도(浮屠)로서, 통일신라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의 것으로 전해져 도선의 부도라고도 불린다. 예산 송림사 부도는 높이가 2.4m이고,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그림이 양각되어 있으며 팔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부도 양식을 따르고 있다. 팔각의 지댓돌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_향천사 구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 _ 향천사 구층석탑 (香泉寺 九層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남 예산군 예산읍 향천사로 117-20 (향천리) 향천사 나한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9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에 각각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겼다. 탑신의 2층 몸돌은 1층에 비해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4층 부터는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포개져 있어 옛 탑이 지니고 있었을 아름다움을 많이 잃고 있다. 얇고 넓적한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으며, 처마의 선이 양쪽 가에서 부드럽게 위로 들려 우아한 곡선을 이루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파손된 부분들이 눈에 띠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_예산 향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_ 예산 향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禮山 香泉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수 량 : 3구 지정일 : 2019.01.30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사로 117-20 시 대 : 1659년 「예산 향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본존 바닥에 묵서가 남아있어 제작자(신원, 운혜 등 7명)와 제작년대(順治16年, 1659년) 등을 알 수 있음 수량은 3구이며, 재질은 목조와 도금으로 이루어져있다. 아미타불좌상은 전체높이 110cm, 어깨너비 56.2cm, 무릎너비 78.5cm, 무릎높이 22cm이고, 관음보살좌상은 전체높이 108cm, 무릎높이 68.8cm, 대세지보살좌상은 전체높이 105cm, 무릎높이 69.5cm이다. 예산 향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禮山 香泉寺..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5호_보덕사 극락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_ 보덕사 극락전 (報德寺 極樂殿) 수 량 : 1동 지정일 : 1995.10.07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로 400-74 (상가리) 보덕사는 서원산 남쪽기슭에 위치한다. 본래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던 가야사의 뒤를 이어 고종 8년(1871)에 처음 지어졌다. 가야사에는 금탑이라 불리는 지극히 빼어난 석탑이 있었고, 그 탑의 4면에는 돌로 만든 방이 있어 각각 돌부처가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이 절의 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철종 11년(1860)에 가야사를 불사르고 아버지인 남원군의 묘를 썼다. 그 뒤 아들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은혜를 갚는다는 뜻에서 지금의 위치에 절을 짓고 보덕사라고 하였다. 보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