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창 오세창 4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 종정와전명임모도 십폭병풍>

<종정와전명임모도 십폭병풍(鍾鼎瓦塼銘臨摸圖 十幅屛風)> _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1925년, 종이에 먹(紙本水墨),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 엣 문자에 대한 오세창의 관심과 이를 활용한 예술적 감각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고대 중국의 기와와 청동기 명문 25점을 임모하여 병풍으로 제작했다. 제1폭 상단 진나라 와당 「여천무극(與天無極) 」'부터 제10폭 하단 청동기 명문까지 장수와 다복 등 길상적인 내용의 문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명문마다 예서나 행서로 뜻과 유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고 직접 새긴 인장을 찍었다. 제10폭의 글 국당 인형께서 보아주십시오. 을축년(1925) 음력 2월. 위창거사 오세창이 옛 것을 어루만지다. 菊潭仁兄雅鑒 乙丑花朝 葦滄居士 吳..

오세창의 <서화합작도>

_ 오세창(吳世昌, 1864~1953) 등 14인, 1920~1933년,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오세창, 이도영(李道榮, 1884~1933) 등 서화가 14인이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오세창은 화면 오른쪽에 '구슬과 비단처럼 아름다움이 한 데 모였구나[珠聯錦合]'와 그림을 잘보았다는 글을 남겼다. 서예가 이한복(李漢福, 1897~1944)은 '유남 선생을 위해 진귀한 소장품을 방하여 드린다'는 글을 남겼는데, 유남은 당대 서화 수장가로 이름이 높던 박재표(朴在杓, 1886~1951)호 추정된다. 이 그림은 당시 유행한 서화합작도의 전형으로 서화가들의 교유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인문(印文) : 「검홍당분전기(劍虹堂分篆記) 」, 「 오세창(吳世昌) 」, 「위창씨(葦滄氏) 」 _ 오세창(吳世昌, 186..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전서연경실>

_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1938년, 종이에 먹(紙本水墨), 국립중앙박물관소장, 2018년 손세기 · 손창근 기증 전서체로 정갈하게 적은 '연경실( 硏經室)'은 경서를 연구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오세창은 김정희와 부친 오경석이 그러했듯 전통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편액 오른쪽 하단에 '무인칠십오웅(戊寅七十五翁)'인문이 있어, 1938년에 제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 찍힌 인장들 모두 오세창이 몸소 새긴 것이다. 인문(印文) : 「여시(如是) 」, 「무인칠십오웅(戊寅七十五翁)」, 「오세창인(吳世昌印) 」, 「위창(葦滄) 」 _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2023.09.30, 국립중앙박물관_근대인 문예인, 위창 오세창 ..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 어 · 거 · 주 」

_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1927년, 종이에 먹(紙本水墨),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 오세창은 일렬로 어 · 거 · 주 세글자를 상형문자로 쓰고 문자와 관련된 옛 이야기를 행서로 적었다. ' 어 · 거 · 주'는 『전국책(戰國策) 』에 실린 고사로 "세력이 약하더라도 서로 힘을 합치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겪은 오세창이 독립의 염원을 담아 이 고사를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 작품과 유사한 를 같은 해 가을에 열린 서화협회전(협전)에 출품했다. _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2023.09.30, 국립중앙박물관_근대인 문예인, 위창 오세창 전시자료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