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기념물 14

진천 배티성지_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 _ 진천 배티 성지 (鎭川 梨峙 聖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인 조선교구신학교 터 수량/면적 : 3개소, 일원(6필지 2,197㎡) 지정일 : 2011.06.04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로 708 (백곡면) 시 대 : 1850~1860년대 진천 배티 성지[鎭川 梨峙 聖地]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성지로 박해를 피해 숨어들은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1830년대에 敎友村이 형성되었으며, 1850년에는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한국 성명 安敦伊) 성인 주교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朝鮮敎區神學校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두 번째 신부인 崔良業(1821~1861년, 세례명 : 토마스) 신부를 비롯하여 프랑스 선교사 프티니콜라(한국 ..

충청북도 기념물 제144호_진천 이영남 묘소, 충용사, 연리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44호 _ 진천 이영남 묘소 (鎭川 李英男 墓所) 수량/면적 : 1곽 지정일 : 2008.08.01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구산3길 65-56 (덕산읍) 시 대 : 1598년(선조 31년) 소유자(소유단체) : 양성이씨군사공파형정공계종중 이영남(1563~1598) 장군은 진천군 기전리에서 태어난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선조 17년(1577)에 별시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선조 25년(1592) 율포권관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원균의 막하 장수로써 소비포권관, 강계부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왜군에 의해 동래성이 함락된 후 도망가려 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여 연합함대를 결성하게 되었고, 그 후 옥포·사천포해전, 한산대첩 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선조 31년..

진천 배티 성지_무명 순교자 14인 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 _ 진천 배티 성지 (鎭川 梨峙 聖地), 무명 순교자 14인 묘 수량/면적 : 3개소, 일원(6필지 2,197㎡) 지정일 : 2011.06.04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로 708 (백곡면) 시 대 : 1850~1860년대 소유자(소유단체) : 재단법인청주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진천 배티 성지[鎭川 梨峙 聖地]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성지로 박해를 피해 숨어들은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1830년대에 敎友村이 형성되었으며, 1850년에는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한국 성명 安敦伊) 성인 주교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朝鮮敎區神學校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두 번째 신부인 崔良業(1821~1861년, 세례명 : 토마스) 신부를 비롯하여 프..

카테고리 없음 2022.10.04

진천 배티성지_삼박골 모녀 순교자의 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 _ 진천 배티 성지 (鎭川 梨峙 聖地), 삼박골 교우촌과 모녀 순교자 묘 수량/면적 : 3개소, 일원(6필지 2,197㎡) 지정일 : 2011.06.04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로 708 (백곡면) 시 대 : 1850~1860년대 진천 배티 성지[鎭川 梨峙 聖地]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성지로 박해를 피해 숨어들은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1830년대에 敎友村이 형성되었으며, 1850년에는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한국 성명 安敦伊) 성인 주교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朝鮮敎區神學校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두 번째 신부인 崔良業(1821~1861년, 세례명 : 토마스) 신부를 비롯하여 프랑스 선교사 프티니콜라(한국 성명 朴德老) ..

충청북도 기념물 제141호_괴산 정호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141호 _ 괴산 정호 묘소 (槐山 鄭澔 墓所) 수량/면적 : 1기/길이1,500㎝, 폭980㎝ 지정일 : 2007.09.07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산 100 시 대 : 1737년 (영조13년) 소유자(소유단체) : 연일정씨종중 이 유적은 문경공(文敬公) 장암(丈巖) 정호(鄭澔,1648-1736)의 묘소이다. 정호는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본관은 연일(延日), 좌의정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숙종 8년(1682)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정언(正言)을 지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

진천 송씨(鎭川 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91호 _ 진천 송인 묘소 (鎭川 宋仁 墓所) 수량/면적 : 일곽(690㎡) 지정일 : 1994.01.07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산 391-3 소유자(소유단체) : 진천송씨대종회 고려 인종 때 공신으로 진천 송씨의 시조인 송인의 묘소이다. 송인은 고려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의 반란군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난이 끝난 후 평장사(平章事)라는 고려시대 최고의 벼슬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송인은 ‘진천백’이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당시 ‘백’이라 하면 그 고을의 행정, 사법은 물론 경제에 관한 모든 일들을 다스리는 높은 벼슬이었다. 송인은 진천백으로 있을 때 고을 사람들이 보다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밤낮으로 노력하였으며 모든 일을 공정히 ..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_진천 남지 묘소 및 신도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 _ 진천 남지 묘소 및 신도비 (鎭川 南智 墓所 및 神道碑) 수량/면적 : 일곽 지정일 : 1988.09.30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18-1번지 소유자(소유단체) : 의령남씨충간공파종회 조선 초기의 문신 충간공 남지의 묘소이다. 그는 개국 공신 남재(南在)의 손자로 17세에 벼슬길에 나가 세종 31년(1449) 우의정을 거쳐 문종 1년(1451) 좌의정에 올랐다. 계유정난 때 병으로 화를 피하고 성종 20년(1489) 손자 남기의 상소로 시호를 받았다. 봉분은 사다리꼴 모양이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 문인석이 1쌍 서 있다. 묘 아래에는 8대손 남구만이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94호_진천 이정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94호 _ 진천 이정 묘소 (鎭川 李挺 墓所) 수량/면적 : 일곽(480㎡) 지정일 : 1994.06.24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사양6길 1-18 (사양리) 소유자(소유단체) : 청주이씨문중진천군종친회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정(1297∼1361) 부부의 묘소이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 음서로 팔관보판관이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358년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내불당 짓는 일을 감독하였으며, 공민왕이 친히 쓴 글씨 ‘탄상하교문(嘆賞下敎文)’을 받았다. 그의 친족은 모두 높은 관직에 올랐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그의 집정기간에는 유력한 지지세력으로서 조선 건국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4호_진천 석장리 유적

충청북도 기념물 제124호 _ 진천 석장리 유적 (鎭川 石帳里 遺蹟) 수량/면적 : 일원(26,684㎡) 지정일 : 2002.04.26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석장리 381 시 대 : 삼국시대 진천 석장리 유적은 미호천 상류에 형성된 충적대지와 노령화된 낮은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해발 105m 내외의 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완만한 구릉의 서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은 국립청주박물관이 실시한 진천군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찾아진 유적으로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차년에 걸쳐 발굴조사되었는데, 발굴지역에서 모두 36기의 철 생산 또는 철제품 제작과 관련된 노적(爐蹟)이 확인되었다. 유적은 낮은 구릉의 작은 골짜기를 이루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정된 공간에 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34호_진천 김덕숭 효자각

충청북도 기념물 제134호 _ 진천 김덕숭 효자각 (鎭川 金德崇 孝子閣) 수량/면적 : 일곽 지정일 : 2005.03.11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1224-5 소유자(소유단체) : 강릉김씨중곤공파문중 조선 세종대의 효자 김덕숭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3년(인조 11)에 세운 정려문이다. 규모는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전(紅箭)으로 막고, 처마 밑 중앙에는 서하(墅河) 임헌회(任憲晦)가 짓고 전우(田愚)가 쓴 정려기를 달았다. 건물 내부에는 현판 외에 효자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덕숭은 한산군수(漢山郡守)의 직(職)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봉양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아버지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 여계소(女溪沼)에 앉아서 어름을 녹이니 잉어가 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