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지본처 25

순천 선암사 오십삼불도

순천 선암사 오십삼불도(順天 仙巖寺 五十三佛圖) _ 조선 1702년 조성, 1908.02.06, 도난 순천 선암사 오십삼불도(順天 仙巖寺 五十三佛圖) _ 조선 1702년 조성, 1908.02.06, 도난 이 불화는 선암사 불조전에 봉안되어 있던 것으로 53불을 6폭으로 나누어 봉안한 오십삼불도(五十三佛圖)의 일부이다. 1998년 도난 이후 현재는 4폭만이 남아 있다. 1999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환수된 선암사 오십삼불도는 원래의 모습이 크게 훼손 된 채 발견되었다. 도난 이후 발견된 오십삼불도는 한 존상씩을 오려 내어 액자를 만들었다. 나머지 부분은 행방은 현재까지 알 수 없다. 순천 선암사 오십삼불도 순천 선암사 오십삼불도 2022.05.22, 불교중앙박물관_돌아온 성보문화재 특별공개전, ..

제천 정방사 나한도 · 독성도

제천 정방사 나한도 · 독성도(堤川 淨芳寺 羅漢圖 · 獨聖圖) _ 대한제국 1900년 조성, 2004.05.13. 도난 광무(光武) 4년(1900)에 제작하여 정방사에 봉안한 나한도와 독성도이다. 일제강점기 재산대장에도 나한도와 독성도가 명기되어 있어 기록과 성보가 일치한다. 나한도는 작은 크기로 한 폭에 열여섯 분의 나한을 모두 그렸다. 원통전의 봉안 공간이 작아 한 화면에 모든 존상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독성도는 19세기부터 유행하였으며, 주로 소나무가 있는 깊은 산에 은거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두 불화 모두 화기가 훼손되어 불화 조성에 대한 정보를 온전히 알아 볼 수 없다. 2014년, 종단과 문화쟂청, 경찰청이 협력하여 31건 48점의 성보를 환수하면서 은닉되어 있던 정방사의 두 ..

대구 북지장사 제석천도

대구 북지장사 제석천도(大邱 北地藏寺 除釋天圖) _ 조선 1758년 조성, 도난일 미상 1758년에 성징(性澄)이 그린 제석천도이다. 제석천은 수미산 정상 도리천(忉利天)에 머무는 천왕으로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한 사람을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화면 중앙의 제석천은 손에 연꽃을 쥐고 의자에 앉아 있다. 화면 중앙의 제석천은 손에 연꽃을 쥐고 의자에 앉아 있다. 제석천의 좌우로는 일월천자와 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상단에는 천녀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이 제석천도를 그린 성징은 18세기 중반에 경상도 지역을 중심을 활동하였다. 1755년 수화승 상오(常悟)와 은해사 대웅전 삼장보살도를, 수화승 임한(任恨)과 운문사 비로전 삼신불도를 그렸다. 또 1767년에는 수화승 두훈(抖薰)과 통도사 괘불을 그리는 등 다..

부산 안적사 치성광여래도

부산 안적사 치성광여래도(釜山 安寂寺 熾盛廣如來圖) _ 조선 1874년 조성, 도난일 미상 안적사 치성광여래도는 도난 시 그림틀에서 그림을 잘라 내면서 그림의 상하좌우가 크게 훼손되었다. 화기도 훼손되었는데, 원 소장처를 은닉하기 위하여 화기의 아래 부분을 의도적으로 잘라 하단 2~3글자를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안적사에는 이 그림과 같이 1874년에 영운(永雲)이 그린 아미타극락회상도가 전한다. 두 그림의 본존은 같은 분이라 할 만큼 비슷하고, 화면을 가득 채운 구름 등의 표현방식이 유사하다. 화면 중앙에는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가 자리하고 그 좌우에는 일광 ·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치성광여래의 좌우 위에는 칠여래와 남극도인이 있고 아래에는 칠원성군 등의 관복을 입고 홀을 든 성중들을 그렸다 부산 ..

고창 문수사 신중도

고창 문수사 신중도(高娼 文殊寺 神衆圖) _ 조선 1791년 조성, 도난일 미상 고창 문수사 신중도는 화기를 통해 건륭乾隆 56년(1791) 계헌(戒憲)이 제작하여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4월에 고창 문수사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헌은 18세기 중반 활동한 화승으로 장성 백양사 아미타후불도와 구례 천은사 지장보살도를 조성하였다. 이 불화는 제석과 법천, 위태천을 하나의 화면에 결합하여 표현하였다. 화면은 상하로 구분되어 위로는 제석과 범천을 중심으로 두 보살과 일궁 · 월궁천자,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과 부채를 든 천동들이 있다. 아래로는 위테천을 중심으로 금강과 팔부중과 천동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고창 문수사 신중도(高娼 文殊寺 神衆圖) 2022.05.22, 불교중앙박물관_돌아온 성보문화재 ..

부산 장안사 신중도

부산 장안사 신중도(釜山 長安寺 神衆圖) _ 조선 1856년 조성, 도난일 미상 장안사 신중도는 도난 시 그림틀에서 그림을 절취하면서 사방이 크게 훼손되었다. 또 원 소장처를 은닉하기 위해 화기에 사찰명이 적힌 부분도 검은색으로 덧칠하였다. 그러나 희미하게 '기장현 불광산 장안사'라고 적혀 있다. 화기에는 함풍(咸豊) 6년(1856)에 화승 금암 천여(錦巖 天如)가 장안사 대법당의 후불탱과 함께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장안사 대웅전에 천여가 신중도와 함께 조성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천여는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를 중심으로 경상도,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하였고, 불화 뿐 아니라 단청, 개금 등 사찰 불사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장안사 신중도 상 · 하로 나누어 인물을 배치하였다. 위로는..

곡성 관음사 지장시왕도

곡성 관음사 지장시왕도(谷城 觀音寺 地藏十王圖) _ 조선 1873년 조성, 도난일 미상 관음사 지장시왕도는 화기를 통해 동치(同治) 12년(1873) 풍곡 덕인(豊谷 德麟), 월허 준언(月虛 浚彦)이 조성하여 대은암 응진전 중단에 봉안하였음이 확인된다. 덕인과 준언은 동시대에 구례 화엄사 각황전 삼세불도(약사불), 화엄사 명부전 지장도, 김제 금산사 명부전 지장도 조성에 함께했다. 이 불화는 화면 하단에서부터 높게 솟아오른 연꽃대좌의 표현이 특징적이다. 연꽃대좌에 밝은 색감의 청색 안료를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다. 적색을 기본으로 하면서 녹색보다는 청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19세기 불화의 채색안료 연구에 자료가 된다. 곡성 관음사 지장시왕도(谷城 觀音寺 地藏十王圖) 2022.05.22, 불교중앙박물..

영천 은해사 신중도

영천 은해사 신중도(永川 銀海寺 神衆圖) _ 조선 1855년 조성, 도난일 미상 불화를 훔친 뒤 화기의 사찰명을 먹으로 덧칠하였으나 희미하게 '운해사(銀海寺)'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신중도는 1855년 12월 20일에 은해사 승당의 신중도로 하은 응상(霞隱 應祥)이 그렸다. 1855년에 응상이 대시주로 훼손된 은해사 불상의 개금과 불화를 조성하였다는 내용의 복장 원문이 은해사에 전하는데, 이 때 조성된 불화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은해사 신중도는 응상의 초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짜임새 있는 구도와 세밀한 필선을 보여준다. 화면 가장 위에 날개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무장형의 위태천이 합장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7위의 신중들이 모두 다른 자세를 하고 자유분방하게 서 있다. 영천 은해사 신중..

영천 은해사 운무암 지장시왕도

영천 은해사 운부암 지장시왕도(永川 銀海寺 地藏十王圖) _ 조선 1747년 조성, 도난일 미상 중앙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과 여섯 보살, 판관, 사자, 옥졸 등 다양한 지옥의 존상들이 함께 그려진 지장시왕도이다. 예천 한천사 지장시왕도와 존상의 구성이 유사하나 상단의 여섯 보살이 화면 좌우측으로 이동되어 작게 그려졌다. 전반적으로 팔공산 화파의 화픙이 보이는 18세기 중엽의 지장시왕도이다. 유출된 이후 불화를 자르고 액자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화기 아랫부분이 절취되어 조성시기를 제외한 원 봉안처와 화승 등의 정보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관련 연구서에 기록이 남아 있어 자환(自還)이 조성하여 은해사 운부암 원통전에 봉안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영천 은해사 운부암 지장시왕도..

예천 한천사 지장시왕도

예천 한천사 지장시왕도(醴泉 寒天寺 地藏十王圖) _ 조선 1748년 조성, 도난일 미상 중앙의 지장보살과 좌우 협시인 도명존자, 무독귀왕, 좌우로 10명의 시왕과 상단의 여섯 보살이 함께 그려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이다. 상단의 여섯 보살과 중 · 하단의 지장보살 및 권속은 구름으로 구획을 나누어 존격을 표현하고 있다. 지장보살 상단으로는 늙은 비구로 추정되는 인물이 표현되었는데 다른 지장시왕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상이다. 지장시왕도 조성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18세기 초반 도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 불화의 장황은 원형이 몇 차례 변형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족자 형태로 표구되었다. 화기가 일부 잘려나가고, 사찰명과 조성시기 등 일부 기록이 훼손되어 원 소장처를 알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