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전북특별자치도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_반계선생유적지

기리여원 2020. 9. 1. 12:34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_ 반계선생유적지 (磻溪先生遺蹟地) , 반계서당

 

수량/면적 : 일원

지정일 : 1974.09.27

소재지 :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128-1번지

 

조선 효종·현종 때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26권을 펴냈다.

선생의 학문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선생의 주된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을 펴 정약용 등의 후기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반계선생유적지 (磻溪先生遺蹟地) 표지판

 

 

반계서당으로 가는 도로입구의 실사구시 표지석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_ 반계선생유적지 (磻溪先生遺蹟地)

 

지금의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유형원이 살던 곳이라 하여 반계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우반동(禹潘洞)이라고 불렀다가 일제강점기에 우동리(禹東里)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당산나무가 있는 곳 주변에 집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고, 와편과 초석만 남아 있다.

반계마을 맞은편 산기슭에 선생이 공부를 하며 《반계수록(磻溪隨錄) 》을 썼다는 반계서당이 있다. 현재의 집은 198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마당과 대문 입구에 선생이 다이에 사용했다고 하는 우물이 있다.

1974년 주민과 정부의 지원으로 '반계유형원선생유적비(磻溪柳馨遠先生遺蹟碑)'가 그의 유허지에 건립되었고, 1974년 9월 27일지방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반계 유형원은 병자호란에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비를 세운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늘 괴로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41세에는 서울에 올라와 외가인 정동에 머무르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중흥위략(中興偉略) 》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으나 그의 뜻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래서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집에는 하루 300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를 사육하고 양궁(良弓)과 조총을 가동(家僮0과 동네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여가가 있으면 연습토록 해서. 묘수(妙手)가 된 자들이 2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보이고 있다.

 

* 반계유형원선생유적비(磻溪柳馨遠先生遺蹟碑, 우물터

  위치 :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810,

 

실사구시(實事求是) 표지석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사구시란 사실에 근거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으로 실학자들이 실학을 정립해 나가 실학을 대표하는 말로 쓰인다.

 

반계서당,반계정으로 가는 데크계단

 

 

 

 

데크계단을 지나 돌이 깔린 도로를 따라 50m가면 반계서당이 보입니다.

 

 

반계서당과 반계정

 

 

반계정(磻溪亭)

 

 

실학의 산실 반계서당

 

위치 :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소재

 

반계는 이곳에서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반계수록 》13책 26권을 완성했다.

 

반계서당(磻溪書堂)

 

반계 유형원이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반계수록 》을 집필한 반계서당. 대대로 한양에 터를 잡고 지낸 경화사족이었던 그는 정쟁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와 새로운 세상을 위한 개혁안을 마련했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광해14~현종14)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광해14~현종14)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학행(學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전라도 부안현의 우반동에 내려와 농민을 지도하며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화하였다.

반계는 위기의 시대를 살았다. 임진왜란(1592~99)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 다시 닥쳐온 병자호란(1636)을 직접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가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백성들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보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반계수록 》은 조선 후기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로 평가받는 저술이다. 이 책에는 극도로 피폐한 국가 현실을 바로잡을 예리한 통찰과 탁월한 개혁안이 담겨있다. 토지를 백성에게 균등하게 배분하는 균전제실시, 세제와 녹봉제의 호가립, 과거제 폐지와 천거제 실시, 신분 · 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 구현, 관제 ·학제의 전면 개편 등이 그의 주료 개혁안이다.

반계의 이러한 생각은 뒷날 이익 · 홍대용 ·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며, 영조 · 정조 · 대원군 등 개혁자 통치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반계수록, 어떤 책인가?

 

반계수록의 집필목적

 

'수록(隨錄)'이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계가 우반동으로 내려오기 1년 전인 31세 되던 해부터 시작하여 19년에 걸쳐 쓴 이 26권의 기록은 그러나 결코 그 이름처럼 가볍지 않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조선의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 구상을 이 책 한 권에 담았다.

 

생각하건데 왕도(王道)가 없어진 뒤로 만사가 기강을 잃어, 처음에는 사사로움을 따라 법을 많들더니, 끝내는 오랑캐가 중국을 지배하는 데 이르렀다. 우리나라도 고루한 폐습이 고쳐지지 않은 것이 많았는데, 더욱 쇠약해져 마침내는 (오랑케에게) 큰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천하 국가가 대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쁜 법을 고치지 않으면 치세(治世)로 돌아갈 수가 없다. (《수록 》권26, <書隨錄後>)

 

위 글은 《반계수록 》집필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계는 15세때 병자호란(1636)을 만나 피난길에 나섰던 일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나라가 왜 그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오랑캐라고 여기는 북방 민족에게 치욕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할 방안은 무엇인가? 반계는 이 질문을 평생 간직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였다.

반계는 그 근본 원인을 위정자의 사리사욕과 그로 인하여 생겨난 잘못된 제도(법)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국력의 신장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반계 실학의 출발은 약해진 국력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그 극복을 위한 성찰의 결과였던 것이다.

 

 

반계수록의 구성과 내용

 

《반계수록 》은 폭 넓은 독서와 전국 유람, 당대 학자들과의 대담, 그리고 농촌 생활에 대한 직접 체험 등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부국강병과 농촌 생활에 대한 직접 체험 등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부국강병과 농촌 경제의 안정책 등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안을 다룬 이 책은 이른바 정책론(政策論)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반계는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총 13책 26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제(田制 : 토지제도)

2) 전제후록(田制後錄 : 재정 · 상공업 관계)

3) 교선지제(敎選之制 : 향약 · 교육 · 고시 관계)

4) 임관지제(任官之制 : 관료 제도의 운용 관계)

5) 직관지제(職官之制 : 정부 기구의 관계)

6) 녹제(祿制 : 관리들의 보수 관계)

7) 병제(兵制 : 군사 제도의 운용 관계)

8) 병제후록(兵制後錄 : 축성 · 병기 · 교통 · 통신 관계)

9) 속편(續篇)의 의례 · 언어 · 기타

10) 보유편(補遺篇)의 군현제(郡縣制 : 지방 제도의 관계)

 

《반계수록 》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부민(副民) · 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작지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원의 최대 목표는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육성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 경제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토지는 국각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경작하는 농민의 땅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自有田)의 원칙과 균전제 사상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도 병농일치의 군사 제도, 즉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원래 그가 주장한 균전제와 부병제는 중구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중시한 제도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립시키기 위해 세제와 녹봉제의 정비도 주장하였다. 세제는 조(租)와 공물(貢物)을 합쳐 경세(經稅)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경세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운을 건 과감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 · 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다.

 

.반계수록(磻溪隨錄) _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광해14~현종14), 17세기, 목판본, 실학박물관소장

 

<반계수록(磻溪隨錄) >

 

반계 유형원이 19년의 세월에 걸쳐 집필한 그이 필생의 역적

 

총 26권에 걸쳐 그의 개혁사상과 이상적 국가 건설안을 담은 대작이다. 《반계수록 》은 정약용 등 후기 실학자들은 물론, 소론계의 성리학자 윤증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개혁군주인 영조와 정조에 의해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었다.

 

반계서당 정문

 

 

반계서당에서 바라본 반계정

 

 

반계서당 울 밖에 있는 우물

 

우물

 

반계서당 주변에는 반계 선생이 손수 팠다는 우물이 2개 남았다. 울 밖과 울 안에 각하나씩 있는데, 이곳에서는 지금도 맑은 물이 솟고 있다.

 

반계서당 울 안에 있는 우물

 

 

반계서당(磻溪書堂)

 

 

반계서당(磻溪書堂) 편액

 

 

반계서당(磻溪書堂)

 

반계서당(磻溪書堂)

 

 

반계서당에서 바라 본 우동리마을 풍광

 

 

반계선생 묘지로 가는 길

 

 

반계선생 가묘

 

 

 

▼ 용인에 위치한 유형원선생묘입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32호 _ 유형원선생묘 (柳馨遠先生墓)

 

소재지 :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

 

 

조선시대 실학자로 근대사회에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 선생의 묘소이다.

광해군 14년(1622)에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5세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7세에는 서경을 읽고 20세에는 문장이 뛰어나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선생은 단 한번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을 뿐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다. 효종 4년(1653)에 32살의 젊은 나이로 전라북도 부안에 내려가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의 저서『반계수록』에 의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자영농민을 육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선생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평생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실학의 선구자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묘역 안에는 혼이 머물고 간다는 직사각형의 혼유석(魂遊石)이 마련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있다. 묘 주위로는 반원형으로 담이 둘러져 있다

 

유형원선생묘 (柳馨遠先生墓)

 

 

유형원선생묘 (柳馨遠先生墓)

2020.08.23. 일요일, 반계선생유적지, 유형원선생묘

글 문화재청, 부안여고 얼아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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