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보물

보물 제141호_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

기리여원 2018. 11. 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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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륜당(明倫堂)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 (서울 文廟 成均館<大成殿東廡西廡三門明倫堂>)


지정일 : 1963.01.21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25-1 (명륜3가) / (지번)서울 종로구 명륜3가 53     

                                                                                                                                                             

문묘는 조선 태조 7(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 송조 6,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1603∼1604)에 세웠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조 39(1606)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중당과 양옆에 있는 익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서재는 기숙사 공간이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大成殿)


대성전(大成殿)

    

대성지성문서왕(大成至聖文宣王) 공부자(孔夫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성묘(聖廟)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태조 6년(1397)에 문묘의 창건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태조 7년(1398)에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정종 2년(1400)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4년(1601)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大成殿)은 남향으로 모두 20간(間)으로, 남북으로는 4개, 동서로는 5개의 기둥이 있으며, 앞에는 당(堂)이 있고, 뒤에는 실(室)이 있다. 대성전은 높은 장대석기단을 쌓고 주좌(注座)를 쇠시리한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拱包)를 짠 다포(多包)양식이다. 정면 5간(間) 측면 4간(間)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단층구조이다.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초제공, 이제공은 모두 강직한 양서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놓이는 첨차는 삼분두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출첨들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끝은 교두형이지만 삼제공 끝은 역시 삼분두형을 이루고 있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현재 대성전의 현판(懸板)은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대성전은 문묘(文廟)의 정전(正殿)으로서 공부자(孔副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공부자의 위패를 중앙 정위(正位)로 하여 4성(聖)과 공부자의 제자 10철(哲), 송조육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가 동서로 위차봉안(位次奉安)되어 있으며,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釋奠)을 지낸다.

현재, 전국의 모든 향교(鄕校)에도 석전을 모시고 있다. 그 가운데 성균관의 문묘는 국가의 문묘로서 건축양식과 위패 등, 규모와 격식이 가장 웅장하다.


   대성전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오전 10시에 분향례(焚香禮)를 하고 있으며, 매년 양력 5월 11일과 9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제레(祭禮)를 거행하는데, 이것을 석전(釋奠)이라고 한다. 석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원형이 보전되어 있으며, 현재<국가무형문화대 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묘에 모신 위패는 시대별로 변해왔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문묘에 모신 위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성전에 공자와 안자(顔子) ·증자(贈子) ·자사자(子思子) ·맹자(孟子) 등의 4성(聖)과 10대 제자,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 6명 등 21위가 모셔졌으며, 동 ·서무에 우리나라의 18위와 중국의 유학자 94위를 합해서 모두 112위를 모셨다. 문묘 전체로 보면 133위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기가 끝나고, 1946년 전국 유림의 대표로서 성균관을 재건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은 1949년 문묘 배향(配享) 성현에 대한 대대적인 조정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동 ·서무에 있던 우리나라의 18현(賢)의 위패는 모두 대성전으로 모시고, 중국의 위패는 모두 땅에 묻었다. 이리하여 현재 성균관 문묘에는 본래 대성전에 있던 21위(位)와 우리나라의 18위를 포함해서 모두 39위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성균관은 옛 성현(聖賢)들에 대한 배향(配享)공간과 교육공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대성전은 배향공간 속한다. 대성전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공부자의 제자, 후대의 성현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학자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성균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개 향교(鄕校)에 모두 설치되어 있으나, 성균관 내의 대성전이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완비되고 규모가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大成殿)


건물 규모는 정면 5간(間) 측면 4간(間)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단층구조이며 다포(多包)양식이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大成殿)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大成殿)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大成殿)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大成殿)



대성전 편액(大成殿 扁額)  


대성전의 편액(扁額)은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글씨이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동무(東廡)>


동무(東廡) · 서무(西廡)


   선유(先儒)들의 위패(位牌)를 나누어 모셨던 곳이다. 태조의 한양 천도이후 태조 7년(1398)에 대성전(大成殿)과 동시에 창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에 중건(重建)되었다.


   대성전 좌 ·우측에 있으며, 동무는 서향, 서무는 동향이다. 각각 11간(間)으로서 맞배지붕 양식이다. 동 ·서무에는 본래 공문제자(孔門弟子) 69위(位)와 중구의 한(韓) ·당(唐) ·송(宋) ·원(元)의 제현(諸賢) 및 우리나라의 18현(賢) 등 112위(位)를 동 ·서로 봉안하였다. 그러나 1949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 ·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고, 그 밖의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 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현재 동 ·서무는 비어 있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동무(東廡)>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동무(東廡)>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서무(西廡)>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서무(西廡)>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삼문(三門)>


  성현(聖賢)들의 신(神)이 드나드는 문묘(文廟)의 정문(正門)으로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지어졌다. 대성전의 남쪽 입구에 남향으로 지은 3간(間_의 문이다. 돌아가신 성현들의 넋이 출입하는 세 계의 문이라고 하여 신삼문이라고 한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삼문(三門)>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삼문(三門)>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삼문(三門)>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삼문(三門)>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명륜당(明倫堂)>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명륜당(明倫堂)>


명륜당(明倫堂)

 

   유학(儒學)의 도를 강학(强學)하며 절차탁마(切嗟琢磨)하던 강의실로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으며 총18칸이다. 장대석 쌓기의 기단을 쌓고 기단 전면에 월대(月臺)를 돌출시키고, 월대 앞에 석계(石階)를 놓았다.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二翼工)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 없이 운두가 높은 중도리를 양 측벽에 선 2개의 고주와 대량 위에 걸치고, 종보를 이들 앞 뒤 중도리에 걸었다. 종보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는 대부분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나, 성균관은 명륜당이 대성전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한다. 현재, 전묘후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향교는 성균관 이외에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 등이다.


   현재 명륜당의 현판은 앞 ·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 주지번(朱之番)의 글씨이고, 명륜당 안의 벽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은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중에서 정원을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 ·서재(東 ·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볔에 북이 울리면 동 ˙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이 밖에도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視讀)과 소과(小科) ·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되었다. 한편, 명륜당 뜰에는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상징목(象徵木)인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명륜당은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한편 영조(英祖) 36년(1760)에 임금이 알성(謁聖)하려고 할 때, 호조(戶曺)가 명륜당이 기울고 퇴락하였음을 보고하여 선혜청사(宣惠廳舍)를 건축하고 남은 자재로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명륜당(明倫堂)>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명륜당(明倫堂)>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으며 총18칸이다


보물 제141호 _ 서울 문묘 및 성균관<명륜당(明倫堂)>



명륜당(明倫堂) 편액(扁額)

명륜당의 편액(扁額)은 앞 ·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 주지번(朱之番)의 글씨입니다, .


명륜당(明倫堂) 편액(扁額)


명륜당 안의 벽위에 있는 편액(扁額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입니다.

명륜당에서 바라 본 천연기념물 제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


글 문화재청, (사)문화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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