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향토유적

부여군 향토유적 제51호_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기리여원 2025. 4. 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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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향토유적 제51호 _ 황일호 신도비 (黃一皓  神道碑)및 황진 효자각 (黃璡 孝子閣)

 

수   량 : 효자각 1동, 신도비 1기
지정일 : 2001.01.03
소재지 :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58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표지석

 

황일호 신도비 (黃一皓  神道碑)및 황진 효자각 (黃璡 孝子閣)

 

황일호 신도비 (黃一皓  神道碑)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 1588~164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 황원(黃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대수(黃大受)이고, 아버지는 황척(黃惕)이며, 어머니는 강백룡(姜伯龍)의 딸이다. 큰아버지 황신(黃愼)에게 입양되었다. 조수륜(趙守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음보로 운봉현감·전주판관·임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35(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1636년 장령이 되었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전공을 세웠고, 척화를 적극 주장하였다. 난이 끝난 뒤 호종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638년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치고자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1641년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강화충렬사(忠烈祠), 부여의열사(義烈祠), 운봉용암서원(龍巖書院), 의주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에 배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일호 신도비 (黃一皓  神道碑)

 

황진 효자각 (黃璡 孝子閣) 

 

황진(黃璡)[1634~1666]의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자는 군미(君美), 호는 아술당(蛾述堂)이다. 할아버지는 황신(黃愼)이고, 아버지는 의주부윤 황일호(黃一皓)[1588~1641]이다. 첫 번째 부인은 연안 김씨(延安 金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 宋氏)이다. 아들은 황하신(黃夏臣황하민(黃夏民황하필(黃夏弼)이다.

 

황진은 1634(인조 12)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황일호가 의주부윤으로 재직 시 명나라와 내통다는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의 거짓 고변으로 청나라 사신에게 체포되어 1641 11 9일에 죽임을 당하자, 황진은 칼을 움켜쥐고 원수를 갚게 된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황진은 이후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홀로 된 어머니를 효성으로 받들어 극진히 봉양하다가 1666(현종 7)에 사망하였는데, 황진의 행적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창원황씨대동보(昌原黃氏大同譜) 등에 기록되어 있다    

글 향토문화전자대전

황진 효자각 (黃璡 孝子閣) 

 

황진(黃璡) 정려(旌閭)

 

2025.03.31,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청허(淸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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