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문화재 20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_공북루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_ 공북루 (拱北樓) 수 량 : 1동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165번지 시 대 : 36년(1603)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_목사 김효성의 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 _ 목사 김효성의 비 (牧使 金孝誠의 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옥룡동 363번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효성 선생의 비이다. 김효성(1585∼1665)은 광해군 5년(1613) 생원이 되었으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조, 윤인, 이위경 등이 인목대비를 해치려고 할 때 이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다 길주에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관직을 되찾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청안현감이 되었고, 이후 남원, 죽산의 부사와 공주, 청주의 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오랜 외직생활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목사 김효성의 비 표지판 2015.07.19. 공주시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_연평부원군 신도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_ 연평부원군 신도비 (延平府院君 神道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9.12.19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이인면 상하만길 17-34 (만수리) 시 대 : 효종1(1650)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놓은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귀(1557∼163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귀는 이이·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후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돌은 머리를 수평으로 내밀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_숭선군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 _ 숭선군 묘 (崇善君 墓) 면 적 : 3,300㎡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산2-1번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의 묘소이다. 군의 이름은 징(徵)이며,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를 따라 공주(公州)로 잠시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궁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공주를 그리워하더니 숙종 16년(1690) 세상을 떠날 때 공주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족의 무덤은 도성(都城)에서 9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중단되었고 그 후 후손에 의해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만들어졌다. 묘 주위에는 ㄷ자형으로 담장을 쌓았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장명등(長明燈:무..

진품을 보다. 국보 제165호_무령왕 발받침

국보 제165호 _ 무령왕 발받침 (武寧王 足座) 수 량 : 1개 지정일 : 1974.07.09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동) 시 대 : 백제시대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왕의 발을 받치기 위한 장의용 나무 발 받침이다. 윗부분이 넓고 아랫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통나무의 중앙을 W자로 깊게 파서 양 발을 올려놓게 만들었다. 전면에 검은색 옻칠을 하고 폭 0.7㎝정도의 금판을 오려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으나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다. 6잎의 금꽃을 거북등 무늬 모서리와 중앙에 장식하고, 꽃판 가운데에 옛날 부인의 머리장식 중 하나인 보요(步搖)를 매달아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무령왕 발받침 표지판 무령왕 발받침 무령왕 발받침 무령왕 발받침 무령왕 발받침 윗면 무령왕 발받..

문화재/국보 2021.09.16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_공주 오룡리 귀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 _ 공주 오룡리 귀부 (公州 五龍里 龜趺) 수 량 : 1기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296번지 시 대 : 조선 중기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徵)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趙氏)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_공주 동원리 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 _ 공주 동원리 석탑 (公州 東院里 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380번지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동원리라는 마을 위쪽의 밭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탑 주변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은 없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현재 세번째 탑신은 없어졌다. 1 ·2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기단과 탑신 몸돌에 새긴 기둥조각 등은 정교하나,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3층 몸돌을 잃어버려 아쉬운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8호_공주 가척리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8호 _ 공주 가척리 석탑 (公州 加尺里 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82.12.31 소재지 : 충남 공주시 탄천면 청림1길 136 (가척리)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청림사의 절터로 전하는 곳에 이 탑이 서 있다. 석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원래는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비교적 작은 크기이며, 각 부분이 일부 깨져 있다. 기단은 아래층과 윗층의 맨윗돌이 탑신에 비해 지나치게 커보여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탑신의 각 지붕돌은 얇고 작으며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다. 낙수면은 느린 경사를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솟아올라 곡선미를 보여준다. 길고 가는 탑신, 지나치게 넓은 기단 등 균형미는 없..

보물 제1285호_공주 청량사지 칠층석탑

보물 제1285호 _ 공주 청량사지 칠층석탑 (公州 淸凉寺址 七層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98.09.15 소재지 :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346(학봉리)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는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칠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세워 두었으며,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길쭉한 형태이다. 기단은 각 면..

문화재/보물 2021.05.12

보물 제1284호_공주 청량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284호 _ 공주 청량사지 오층석탑 (公州 淸凉寺址 五層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98.09.15 소재지 : 충남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346(학봉리)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오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문화재/보물 202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