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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고문서 67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봉사일본시문견록>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복제품 > _ 조명채(曺命)0 저(著), 1748년(영조 24), 2책, 필사본, 35.7×23.4c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후기 문신 조명채(1700~1764)가 1748년 통신사 종사관(從事管)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지은 7게월간의 사행일록(使行日錄)이다. 이때의 통신사 파견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9대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의 장군(將軍)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행단의 여정과 임무를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으며, 일본의 풍속 · 역사등에 대한 정보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해당 사행의 여정은 수행화원(隨行畵院)이었던 이성린(李聖麟, 1718~1777)에 의해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묘사되어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라는 이름이 붙여..

문화재/고문서 2024.08.26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일동장유가>

_ 김인겸(金仁謙) 저(著), 18세기 이후, 4권 4책, 필사본, 31.3×22.1c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1763년(영조 39) 일본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김인겸이 지은 기행 기록이다. 1763년 8월 3일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1764년 7월 8일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할 때까지 약 11개월간의 여정과 견문을 한글 가사로 기록하였다.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풍속과 사람됨이 음란하다고 하거나, 일본의 관료인 관백(關伯)에게 절하는 것이 치욕스럽다고 국서 전달 의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일본을 경멸하고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일본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순한글의 가사로 되어있어 한국 문학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2024.06.07, 서울대학교 규장각_우리의 기록..

문화재/고문서 2024.08.08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사일기>

(東槎日記), 복제본> _ 박재(朴梓) 저(著), 1617년(광해군 9)이후, 1책, 필사본. 28.1×18.4c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1617년 6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사신을 보낸 경위와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 사행은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오사카 평정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실제로 잡혀간 조선인을 송환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고 이때 약 200여 명이송환되었다.책의 앞머리에는 일본이 1616년 (광해군 8)에 보낸 사신에 대한 답례 문제 논의, 파견한 사신의 명단 등이 기록되어 있고, 6월 1일 한성을 출발하여 8월 20일 일본 본토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 일본 관백(關伯)에게 국서를 전달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9월 11일 일본을 출발하여 귀환하면서 ..

문화재/고문서 2024.07.31

백암산정토사사적

_ 근현대, 종이에 먹, 백양사성보박물괸백양사에서 소장하고 있던 백양사의 역사 및 불사와 관련한 기록들을 수집 · 정리한 후 필사한 책이다. 백양사의 역사와 활동했던 역대 스님들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임과 동시에 왕실과 백양사의 관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 '도광이십구년기유중추일(道光二十九年己酉仲秋日)'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1849년에 서문을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2023.10.07 , 불교중앙박물관_백암산 백양사전시자료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문화재/고문서 2024.07.31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흥덕고창창의>

_ 흥덕현(興德縣) 편(編), 1895년(고종 32), 1책, 필사본, 31.1×21.9c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서울대 규장각 『흥덕고창창의』는 흥덕현감 윤석(尹錫)의 협조 아래 흥덕유생 강영중(姜泳重), 박윤화(朴胤和), 고창유생 강우중(姜宇重)등이 1894년 9월 수성군을 조직하여 활동한 기록을 모은 문건이다. 농민군 진압 후 논공을 위해서 1895년 완성하였다.  「거의사실(擧義事實) 」, 「취의통문(聚義通文) 」을 비롯하여 「밀령(密令) 」, 「전령상서(傳令上書) 」등이 수록되어 있고 「흥덕수성청좌목(興德守城廳座目) 」과 「고창수성청좌목(高敞守城廳座目) 」에는 각기 소임의 명단이 게재되어 있다.특히 「거의사실 」에서는 동학농민군을 '황지적자(潢池赤子)'로 표현하여 무지한 백성들의 어리광쯤으로..

문화재/고문서 2024.07.23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

_ 중관(中觀) 해안(海眼, 15867~?), 조선 1705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중관 해인이 쓴 금산사 역사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금산사는 1601년부터 30여 년간 사찰을 재건하였다. 1635년, 중관 해안은 사찰의 역사와 주요 인물 그리고 전각과 산내 암자 등을 기록한 『금산사사적 』을 발간했다. 이 책은 사적기와 참고문헌을 대교(對校)하여 검증의 과정을 거친 뒤 1705년에 다시 편찬하였다. 해안은 외숙인 뇌묵처영을 스승으로 삼고 출가한 뒤 서산 휴정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임진왜란 다이에는 처영과 함께 의승군으로 활동하였다. 말년에는 금산사, 대둔산, 화엄사의 사적기를 찬술하였다. 전란으로 인해 소실된 사찰과 조선 불교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2..

문화재/고문서 2024.07.18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취의록>

_ 흥덕현(興德縣) 편(編), 1894년(고종 31), 1책, 필사본, 24.7×21.8c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취의록 』은 1884년 9월 동학농민전쟁에서 전주성이 함락되자 흥덕현(興德縣) 등지의 양반들이 이를 성토하기 위하여 참여자를 취합하여 작성한 문건이다. 명단은 흥덕(興德) · 고창(高敞) · 고부(古阜) · 부안(扶安) · 장성(長城) · 무장(茂長) 등의 참여자 명단과  「취의통문( 聚義通文) 」이라는 취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난신적자(亂臣贼子) '로 규정하고, 농민군이 전주성을 빼앗고, 양반들을 협박하고, 관리를 능욕한 것에 대해 성토하였다. 2024.06.07, 서울대학교 규장각_우리의 기록, 인류의 기억전시자료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문화재/고문서 2024.07.18

<신증동국여지승람>

勝覽) > _ 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지리정보를 수록한 책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을 1530년에 증보한 책이다. 전국 군현의 지리정보와 함께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있다. 금구현 금산사 설명에서는 견훤에 대한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후백제 견훤이 금산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금산사에서 견훤의 위상이 컸음을 알려 주고 있다. 견훤의 아들인 금강(金剛, ?~935)의 총애와 신검(新劍, 10세기 활동)의 반란으로 인한 유배와 도피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勝覽) >  2024.07.10, 국립전주박물관_미륵의 마음, 모악산 금산사전시자료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문화재/고문서 2024.07.16

진표율사의 일생이 담긴 기록, 송고승전(宋高僧傳)

_ 찬녕(贊寧, 919~1002), 일본 20세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진표율사의 일생이 담긴 기록 『송고승전 』의 진표율사 전기는 가장 이른 시기 기록이다.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전하는 저술이 없음에도 진표율사 전기가 중국 고승 전기에 실려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진표율사의 전기는 권 14 「명율(明律) 」 「백제국금산사진표전(百濟國金山寺眞表傳) 」에 실려 있다. 다른 기록과 달리 출가 동기가 상세히 나오고 활동 무대는 금산사에 한정되어 있다. 스승이나 『점찰경 』, 점찰법회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간자의 개수는 108개로 기록되어 있다. _ 찬녕(贊寧, 919~1002) 진표율사(眞表律師, 8세기 활동) 진표율사는 12세에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 8세기 활동)에게 출가하였습니다. 자신의..

문화재/고문서 2024.07.15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

_ 조경남(趙慶男, 1570~1641), 조선 후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임진왜란 당시 뇌묵대사 처영의 활약을 담은 기록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남원 출신 산서(山西) 조경남이 1585년부터 1637년까지 57년 동안 나라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 』 편찬을 위해 원본을 빌려가 참고할 정도로 역사성을 인정받은 책이다. 임진왜란 당시 뇌묵대사 처영이 권율장군과 함께한 내용과 남원 교룡산성을 고쳐 쌓은 내용 등 처영의 활약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1593년(선조 26) 12월 5일원수 권율은 합천에 그대로 머물고, 승의장 첨지 처영으로 하여금 남원의 교룡산성을 고쳐 쌓게 하니, 처영이 의령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교룡산성에 주둔하여 수..

문화재/고문서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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