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_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지정일 : 2000.04.17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 선생이 저술 활동을 하던 건물이다.
선생은 조선 현종 1년(1660)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그의 대표적인 농학서 『색경』을 저술했다.
처음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규모였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 반으로 누마루가 덧붙어 있어 乙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향집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 보통 좌향의 배치에서는 남향이나 남서향, 남동향을 따르는 것에 비해 이 가옥은 방향보다 배산임수의 자연지세에 따라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서계 초상화(西溪 肖像畵) _ 숙종연간(1690년경), 축, 견본채색, 85×58.6cm, 족자 140 ×78cm
창주(滄洲) 조세걸(曺世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서계의 초상화.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가한 이름난 화가로 서계에게 팔선도(八仙道)를 증정하고, 석천동을 방문하는 등 서로 교우가 깊었다. 이 초상화 역시 그 연장 선상에서 그려진 것으로 이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 박태보였다.
서계 박세당선생에 대하여
여기 시대를 초월해 살았던 한 지성이 있으니,
서계 박세당이 바로 그 사람이다.
기환자제(綺紈子弟)로 태어나 문과에도 장원한 서계는 한 때 관료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며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타협과 쟁론을 일삼는 사환(仕宦)을 천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학자로 돌아오기까지 10년의 모진 풍상을 뒤따랐고,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이 때 거계가 찾은 곳이 수락산 석천동이었다.
아버지 금주군(錦州君)의 유업이요. 먼저 간 아내 의령남씨의 유혼이 깃든 석천동은 풍광도 빼어났지만 서계에서는 더할 데 없이 아늑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낮에는 재야 경세가로서 적삼에다 땀을 묻히며 채전을 일구었고 밤이면 삼간 초옥에서 학문에 열중하며 학인이로서의 냉철함을 가다듬었다. 치밀한 현장실습의 경험을 담은 색경은 농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체화된 애민사상의 구체적 실천이었고, 사변록은 기존 학풍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주자학을 신봉하던 당시의 사상계는 서계의 학문적 태도와 사변록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이에 서계에서는 사문난적이란 올가미가 씌어졌고, 옥고 사변록도 조목조목 변파되어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서계는 서울로 압송되어 대죄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손수 지은 묘표에다 「어떤 시련에도 세상에 고개를 숙이거나 소침해 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썼다.
그랬다. 서계의 학문은 문약(文弱)의 시대가 낳은 학술의 유희가 아니라 대장부적인 기상에 바탕한 한 지성의 소인이었던 것이다. 비록 서계의 학문은 그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지성과 실천에 바탕한 애민사상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채 소중한 정신유산으로서 면면히 전해져 왔다.
이제 서계의 학문은 주자학의 굴레가 아닌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고, 특히 2003년 8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학술행사와 현양사업이 이루어짐으로써 서계의 참모습이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계문화재단에서는 이러한 추세에 발 맞추어 다양한 문화, 학술행사를 통해 선생의 정신세계가 바르게 이어지는데 앞장서고, 그러한 활동이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가고자 한다.
* 기환자제((綺紈子弟) : 비단옷을 빕고 사는 귀족가문의 자제.
* 사환(仕宦) ; 벼슬하다.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 문화재 답사차 왔다고 전화를 했더니 쾌히 승락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_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약420년 된 은행나무
이 마을 은 장암동 수락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써 조선 숙종때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관직을 물러나 한 때 이 곳에 낙항하여 궤산정을 짓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손수 농사를 지으며 [색경]이라는 농사에 관한 책을 저술한 곳이다.
이 나무는 당시 궤산정에서 학문을 익히던 유생들이 휴식시간에 머리를 식혀주는 정자목으로 이용했던 곳으로 보여지며, 지금도 수세가 왕성하여 해마다 은행이 많이 열려 후손들은 박세당 선생의 업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나무라 한다
*가을이 되면 노란단풍이 물들어 아름답겠습니다. 11월 첫째주 일요일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_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서계종택(西溪宗宅)
서계 박세당 선생이 처음 이곳에 정착한 후, 그의 종손들이 대대로 거주해온 가옥이다.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 소재.
서계 박세당은 이곳에 정착한 후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였는데, 산등성이는 ‘동강(東岡)’, 시내는 동계(東溪)라고 불렀다. 방위상 서울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르면, 이 동계로부터 북쪽으로 8-9보 가면 서계가 사는 집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의 서계종택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서계의 「자찬묘표(自撰墓表)」에 따르면, (박세당의 집은) 울타리는 없었지만 복숭아와 살구나무, 배나무와 밤나무에 둘러싸인 집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행적구역상으로는 양주목 둔야면(芚夜面) 장수원리(長壽院里)였다. 서계는 자신의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지 주변의 언덕을 ‘악구(樂丘)로 부르기도 하였다.
종택은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집 앞 어귀에 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개울을 따라 세워져 있는 정자, 강당(계당) 터 및 그 뒤의 묘택 일대는 조선후기 사대부 생활 공간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교육적, 문화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전쟁 기간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사랑채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 건물은 대부분 후대에 건물이 지어진 것이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1999년 8월에 경기도 전통종가로 지정됐고, 이중 사랑채는 2000년 4월 17일에 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됐다.
정매당(征邁堂) 편액
정매당(征邁堂) 편액은 서계의 8세 종손인 박제경(朴齊敬)의 글씨임.
루산(樓山) 편액
루산 편액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 1779~1763)의 글씨.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_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서계종택(西溪宗宅)
반남박씨 서계파의 종택. 서계 당대의 건물은 아니고 5세손 박종길(朴宗吉)이 1800년대 중반에 개축한 것이다. 당호는 정매당(征邁堂)이다. 서계의 자찬묘표에 따르면, 서계 당대에는 복숭아, 배, 살구, 밤나무로 울을 삼은 소박한 초가집이었고, 행정 구역상으로는 양주목 둔야면 장수원리에 속해 있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_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사랑채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 반으로 누마루가 덧붙어 있어 乙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_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사랑채 누마루인 관어정(觀魚亭) 편액
서계박세당선생 영진각 출입문
서계박세당선생 영진각
박세당사랑채와 영진각
출처 문화재청,西溪서계 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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