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유형문화재 1049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41호_자수 '상궁청신녀'명 연화봉황문 방석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41호 _ 자수 '상궁청신녀'명 연화봉황문 방석 (刺繡 ‘상궁청신녀’銘 蓮花鳳凰文 方席)수 량 : 1점지정일 : 2019.02.1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 ‘상궁청신녀 임인생 리씨정희행 생전무병소원 사후왕생극락발원’ 명문에 의해, 임인생(1842년 경) 상궁이 무병장수와 영생극락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을 알 수 있음.자수의 솜씨나 바느질이 소박한 편이나, 방석의 형식이나 문양의 소재가 복온공주의 길례용 궁중 양식의 방식과 유사하게 궁중의 수방나인이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등 공예사적으로 의미를 지님.자수 '상궁청신녀'명 연화봉황문 방석 (刺繡 ‘상궁청신녀’銘 蓮花鳳凰文 方席) 표지판 _ 19세기, 비단에 자수, 서울공예박물관 연꽃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40호_자수 연지봉황문 방석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40호 _ 자수 연지봉황문 방석 (刺繡 蓮池鳳凰文 方席) 수 량 : 1점지정일 : 2019.02.1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시 대 : 조선시대 전통적인 자릿수와 자련수로 수놓았으며, 방석 위의 봉황무늬가 치밀하고 정교함. 한말 궁중의 수방 나인이 제작한 최고 수준의 자수유물로, 공예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유물임.자수 연지봉황문 방석 (刺繡 蓮池鳳凰文 方席) 표지판 _ 19세기, 비단에 자수, 서울공예박물관 소장 주홍색 운보 무늬 비단과 초록색 연꽃 무늬 비단에 새와 꽃을 수놓은 방식입니다. 가운데 연꽃을 중심으로 모란, 매화, 봉황, 백로, 꾀꼬리, 원앙, 나비를 배치하였습니다. 가장자리의 마름모 무늬는 실을 작은 고리로 만들어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5호_청룡사 가사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5호 _ 청룡사 가사도 (靑龍寺 袈裟圖) 수 량 : 1幅지정일 : 2005.12.29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룡사 가사도는 1902년에 조성된 가사탱(袈裟幀)으로 수가사(繡袈裟) 형태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화면은 붉은 바탕 위에 세로로 27칸의 복전문(福田文)을 그리고, 좌우 2칸을 제외한 25칸에는 각 칸마다 위부터 4줄까지는 불(佛), 보살상, 그 다음 2줄은 호화로운 책갑(冊匣)에 들어있는 각종 불경, 맨 아랫줄에는 비구상(比丘像)을 그려 넣어 불상 50구, 보살 50구, 비구상 25구 등 총 125구에 달하는 많은 존상을 묘사하였다.이러한 가사탱은 조선 말기 왕실에서 유행하던 장식화인 책거리병풍 형식을 따른 것으로 현재 유례가 매우 드믄데, 붉은 가사의 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_밀양 표충사 고승진영 및 팔상도, 사명대사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_밀양 표충사 고승진영 및 팔상도 (密陽表忠寺高僧眞影및甘露圖) , 사명대사 진영 (四溟大師 眞影) 「밀양 표충사 고승 진영 및 감로도(密陽表忠寺高僧眞影및甘露圖)」는 25점의 고승 진영과 1점의 감로 탱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사명대사 진영과 서산대사 진영, 기허대사 진영은 현재 표충사 내의 표충사(表忠祠)에 봉안되어 있는 진영으로 봄과 가을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그 외의 진영은 표충사 수장고에 격납하여 관리 중이다. 감로도는 1738년에 제작되었으며, 18세기 감로도의 형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1990년 1월 16일 「밀양 표충사 영정 및 탱화」라는 명칭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2018년 12월 20일 「밀양 표충사 고승진영 및 팔상도」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_거제향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 _ 거제향교 (巨濟鄕校) 수량/면적 : 11동/6,049지정일 : 1982.08.02소재지 : 경상남도 거제시 기성로7길 10 (거제면, 거제향교)시 대 :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조선 세종 14년(1432) 고현에 처음 세워졌으나 현종 5년(1664)에 거제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재가 앞에 있고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명륜당의 서쪽에 서재가 없고, 대성전의 규모가 명륜당에 비해 매우 큰 것이 특이하다. 다른 향교에 비해 영역이 넓으며 전체에 토속적인 돌담을 둘렀다.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 노비·전적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_부여 동헌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_ 부여동헌 (扶餘東軒) 수 량 : 3동지정일 : 1982.08.03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5 (관북리)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 건물로 동헌·객사·내동헌 등이 남아있다. 동헌은 당시 부여현의 공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고종 6년(1869)에 지었고 1985년에 크게 수리하였다.동헌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도 하는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으로,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왼쪽 3칸은 대청으로 판벽을 치고 문을 달았으며,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 툇마루를 놓았다.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결려 있으며 ‘제민헌’이라고도 한다.동헌과 같은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2호_정선 필 청풍계지각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2호 _ 정선 필 청풍계지각 (鄭敾 筆 淸風溪池閣) 수   량 : 1점지정일 : 2019.04.10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25 (부민동2가,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시    대 : 조선시대 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청풍계(淸風溪)의 풍경과 그 속에 자리 잡은 청풍지각(淸風池閣)을 표현한 진경산수화이다. 청풍계는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 이란 의미로 서울 인왕산 기슭의 골짜기인 현재 종로구 청운동 일대를 말한다. 이 작품은 정선의 노년시절 무르익은 화법에 청풍지각을 중심으로 그려진 유일한 작품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광역시지정 문화유산자료에서 유형문화유산으로 승격되었다. 화면 우측에는 ‘청풍계지각(淸風溪之閣)’의 제목과 ‘겸재(謙齋)’라는 호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6호_의열사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6호 _ 의열사비 (義烈祠碑) 수   량 : 1기지정일 : 1976.01.08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석탑로남령길 36 (부여읍)시   대 : 1575 의열사의 건립과정과 그곳에 모신 인물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이다. 의열사는 조선 선조 8년(1575) 부여현감 홍가신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선조 10년(1577)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비의 형태는 네모진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이 고장 출신이었던 백제의 3충신(忠臣)인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시대에 신돈을 탄핵하다가 물러난 이존오의 공로가 후대에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긴 홍가신이 사당을 지어 이들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는 조선시대의 정택뢰, 황일호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_부여 석목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  _  부여 석목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扶餘石木里石造毘盧蔗那佛坐像) 수   량 : 1구지정일 : 1973.12.26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논절로 25-6 (석목리)시   대 : 고려시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석목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옛 절터에 모셔졌던 주존불(主尊佛)로서,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부처의 얼굴이 눈병에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얼굴이 많이 손상되었다.머리 위에는 넓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으며, 둥글고 풍만한 얼굴은 손상되어 세부기법은 알 수 없다. 양 손은 가슴에 모아 오른손이 왼손 검지를 감싸고 있는데, 손과 발의 세부수법이 형식화 되었다.옷은 몸에 밀착되어 간략한 옷주름으로 표현하여 무릎 앞에까지 덮여 있는데, 옷주름이 섬세하지 못..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_부산각서석, 대재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 _ 부산각서석 (浮山刻書石) 수   량 : 1기지정일 : 1976.01.08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672 부여군 백마강가 암벽에 새긴 글씨로,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경여(1585∼1657 ) 선생의 의지를 후손에 알리고자 쓴 것이다.조선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던 백강 이경여 선생은 효종 8년(1657)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이완·송시열과 함께 청나라를 쳐야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왕은 ‘경의 뜻이 타당하고 마땅하지만 진실로 마음이 아프나 뜻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늦다’라는 답장을 내렸는데, 청나라에서 그를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도록 간섭하여, 결국 그는 부여로 낙향하였다.그 후 우암 송시열이 이 내용을 여덟 자로 써서 후손에게 전하였고, 숙종 26년(1700) ..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