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5대고궁/경복궁

경복궁 문화재(2013.11.18, 2019.08.18)

기리여원 2019. 8. 20. 09:32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景福宮)


경복궁은 1395년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다. 위로는 백악산에 기대어 터를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대로 ]가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경복(景福)'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 경복궁에는 왕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외전과 궐내각사들, 왕과 왕비 및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전각들, 휴식을 위한 정원 등 500여 동의 건물들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경복궁 문화재


  1. 국보 제223호 _ 경복궁 근정전

  2. 국보 제224호 _ 경복궁 경회루

  3. 보물 제809호 _ 경복궁 자경전

  4. 보물 제810호 _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

  5. 보물 제811호 _ 경복궁 아미산굴뚝

  6. 보물 제812호 _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7. 보물 제847호 _ 경복궁 풍기대

  8. 보물 제1759호 _ 경복궁 사경전

  9. 보물 제1760호 _ 경복궁 수정전

10. 보물 제1761호 _ 경복궁 향원정

11. 사적 제117호 _ 경복궁


국보 제223호 _ 경복궁 근정전 (景福宮 勤政殿)                                


수   량 : 1동

지정일 : 1985.01.0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4년(1395)에 지었으며, 정종과 세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문무백관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차일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주변으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국보 제224호 _ 경복궁 경회루 (景福宮 慶會樓)                                


수   량 : 1동

지정일 : 1985.01.0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시   대 : 조선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경회루는 성종 때 고쳐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보물 제809호 _ 경복궁 자경전 (景福宮 慈慶殿)


수   량 : 일곽

지정일 : 1985.01.0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자경전은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대비전으로서 중건 이후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서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은 대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 건물로, 총 44칸 규모이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또,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자경전은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다.


보물 제810호 _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 (景福宮 慈慶殿 十長生굴뚝)

 

수   량 : 1기

지정일 : 1985.01.0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자경전은 1867년에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십장생 굴뚝은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든 것이다.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지붕 위에는 연기를 빠지게 하는 시설을 해 놓았다.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보물 제811호 _ 경복궁 아미산 굴뚝 (景福宮 峨嵋山 굴뚝)

 

수   량 : 4기

지정일 : 1985.01.0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보물 제812호 _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수   량 : 일곽

지정일 : 1985.01.0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근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북측으로는 사정문(思政門)이 있어서 사정전과 연결된다.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근정문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남문 중 유일하게 2층 건물로 지어져서 법궁의 위엄에 맞게 조성되었으며,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물 제847호 _ 경복궁 풍기대 (景福宮 風旗臺)


수   량 : 1기

지정일 : 1985.08.09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풍기와 풍기대에 대해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화강암을 다듬어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8각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8각형 기둥의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옆으로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구멍을 뚫었다. 깃대 길이는 확실치 않고 깃대 끝에는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었다.

세종 때 이후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하고 강과 개천의 수량을 재는 등 관측기술이 발달했는데 풍기에 의한 바람 측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18세기에도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풍기대도 18세기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림인 동궐도(東闕圖, 고려대학교박물관소장)에도 풍기대 위에 길게 나부끼는 풍기가 그려져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크기는 아랫단의 높이가 80.8㎝, 위 8각 기둥의 높이가 143.5㎝로 전체 높이가 224.3㎝이다. 경복궁 풍기대는 창경궁 풍기대와 함께 조선시대 바람을 측정했다는 실증적 자료로서 기상관측의 선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물 제1759호 _ 경복궁 사정전 (景福宮 思政殿)

 

수   량 : 1동

지정일 : 2012.03.02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0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경복궁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 온 궁궐건축의 제도인 전조후침 및 삼문삼조의 기본배치 원리에 따라 외조, 치조, 연조의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각기 제 기능에 따른 전각이 배치되었다. 치조 구역에는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이 있고, 그 뒤로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자리 잡고 있다. 사정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정사를 보살피던 곳으로 근정전에서 뒤편으로 사정문을 지나면 정면에 위치하며, 사정전의 동측으로 만춘전과 서측으로 천추전이 있다.

사정전은 만춘전, 천추전과 더불어 편전으로서 정사를 보았던 곳으로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고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온돌이 있어 추운 겨울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에서 정사를 보고 경연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정전의 정문은 근정전과 통하는 사정문인데 그 좌우에는 서쪽부터 천자문의 글자 순서를 따라 천자고~월자고까지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였다.

사정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인 태조 4년(1395)에 지어졌으며, 명종 8년(1553)에 불탄 뒤 재건했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궁문이 모두 소실 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경회루, 수정전 등과 함께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사정전은 박애관, 만춘전은 경비실, 천추전은 심사실 등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으며, 그 후 6.25전쟁으로 만춘전이 파괴되었다가 1988년 다시 복원되었다. ‘사정’은 ‘선정을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작명하였으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여 정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사정전의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조판서로 있던 조석우가 썼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어칸을 협칸보다 2배 가까운 길이로 넓게 잡았고, 측면에서도 중앙칸을 훨씬 크게 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장대석 3벌대 기단이고, 어칸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초석은 원형초석이다. 가구는 2고주 7량가의 다포식이며, 단면이 굵은 창방 뺄목은 운궁처리로 하여 평방을 받고 있다. 평주에서도 퇴보의 뺄목을 안초공으로 연결하여 창방과 평방을 감싸게 되어서 화려한 감각을 주게 된다. 공포는 4면 모두 어칸에만 2개의 간포를 배설하고, 협칸, 퇴칸은 1개를 설치하였다. 쇠서는 앙서로 처리하였고, 내부의 포작은 모두 화려하게 운궁초각하였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단청문양이 화려하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을 배열했다.

창호는 4면 모두 띠살창 4분합문으로 하고, 그 위에 교창을 설치하였다. 바닥은 우물마루에 내부칸막이 시설 없이 하나의 공간이지만 중앙에 어좌를 설치하기 위한 2개 고주를 세워 상부에 벽화가 있는 벽체가 구성되어 있다.

사정전은 왕이 평소에 거처하며 정무를 수행하는 편전으로 정전인 근정전과 함께 치조의 중요한 건물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당시의 외관이 잘 남아있고, 편전의 위엄을 지닌 공포짜임을 비롯한 구조양식 전반과 기능 충족을 위한 공간구성 등의 면모를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보물 제1760호 _ 경복궁 수정전 (景福宮 修政殿)


수   량 : 1동

지정일 : 2012.03.02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0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수정전은 근정전 서측에 있는 건물로써, 북쪽으로는 경회루가 자리 잡고 있다. 수정전이 있는 권역은 세종 연간에는 학문을 연구하며,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치의 본산이었던 집현전이 있던 궐내각사의 지역에 해당하며, 동쪽으로 사정전의 왕의 영역과 신하들의 영역이 만나는 접점인 이곳에 궐내의 관청인 각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수정전은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왕의 편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를 여기에 두고, 이후 내각청사로 사용되었다. 4면에는 행각과 남쪽의 외행각이 일곽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일제 때 훼철되고 현재는 본건물인 수정전만 남아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중건 당시에는 4면의 행각과 남쪽으로 외행각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내부 벽체와 창호가 훼철되었고, 그 일곽 또한 1915년 가을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자 하는 일제의 전초작업으로 시정 5주년 기념 사업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모두 헐리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정’이란 의미는 ‘정사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로 현판글씨는 중건 당시 조석원이 썼으며, 조선 후기 문신으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으며,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인 궁궐지에는 수정전과 이에 부속된 행각의 명칭, 규모, 양식, 주칸 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 10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긴 장대한 건물로 남향으로 앉혀진 1고주 7량가의 이익공양식 단층 팔작지붕이다.

수정전 정면에는 네 벌대의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3곳 설치하였고,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계단과 차별화시켰으며, 이것은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다섯 벌대나 되는 높은 건물기단 위에는 4각 초석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띠살창 분합문과 빗살창교창을 사방 전면으로 둘러 설치하였다.

높은 기단의 좌우 측면에는 불을 넣는 아궁이를 설치하여 온돌방을 두었다. 평면은 정면10칸·측면4칸으로 앞면 퇴칸 주간을 넓게 하여 10칸의 도리방향을 모두 대청으로 터져있으며 좌우 및 후면의 퇴칸이 연결되어 내부 회랑 역할을 한다.

공포는 길게 뻗은 쇠서의 이익공 위에 소로를 높고 양봉한 보머리를 받으며 주심도리를 받아준다.

지붕의 용마루 및 내림마루엔 양성을 하고 취두·잡상을 배열했다. 건물의 짜임이 견고하고 창의력있는 구조다.

수정전은 외관, 가구부재 등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중건 당시의 모습이 잘 유지되어 있다.

수정전은 근정전 서편의 궐내각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다


보물 제1761호 _ 경복궁 향원정 (景福宮 香遠亭)


수   량 : 1동

지정일 : 2012.03.02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0 (세종로)

시   대 : 조선시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이다. 향원지의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대 학자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서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침전의 후원으로 여기에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등 원림 (苑林)공간이 된다.

향원지가 있던 곳에는 본래 세조 2년(1456)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세조실록」에 보인다.

향원지는 4,605㎡의 넓이의 방형인데,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지에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향원지의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이 향원정에 들어가는 다리인 '취향교'는 본래 목교로서 1873년에 향원정의 북쪽에 건청궁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취향교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으나, 6·25전쟁 당시 없어졌으며, 현재는 1953년에 지은 다리가 향원지 남쪽에 있다.

본래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m,폭 165cm)이다.

향원지의 북쪽으로 녹산지역에 있는 담장에는 인유문(麟遊門)이란 일각문(一角門)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봉집문(鳳集門)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연못은 한층 아늑한 정취(情趣)에 싸여 있었다.

향원정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로, 고종 4년(1867)부터 고종 10년(1873)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다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함화당, 집경당이 위치해 있다.

정자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며,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층과 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층 기둥 위에 짜여지는데, 기둥 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枓:대접받침)를 놓고 끝이 둥글게 초각(草刻)된 헛첨차를 놓았다. 일출목(一出目)의 행공첨차를 받치고, 다시 소로를 두어 외목도리(外目道里)밑의 장혀를 받친 물익공이다.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살창틀을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모지붕으로,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하였다.

향원정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경복궁 후원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안겨있는 상징적 대표 건물이다. 육각형 초석, 육각형 평면, 육모지붕 등 육각형의 공간을 구성하여 섬세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비례감이 뛰어난 정자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높다.

 

글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