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5대고궁/경복궁

5대 궁궐 정문(광화문, 돈화문, 홍화문, 대안문, 흥화문)

기리여원 2019. 8. 30. 09:42

경복궁 광화문(光化門)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입니다. 경복궁 창건시 궁제에 따라 '午門'으로 부르다가 세종 8년(1426) 궁의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때 '광화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광화문은 '광천화일(光天化日)'의 준말로 '光天'은 밝은 세상, '化日'은 안정된 시대, 즉 태평성대를 뜻합니다. 어둡고 혼란한 정치를 지양하고 밝고 안정된 정치를 이룩하여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통치자의 의지와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글 : 궁궐문화원

 

광화문 현판은 현재 '힌색바탕 검은 글씨'이나  미래에는 『경복궁 영건일기』(1902)에 나온 '묵질금자(墨質金字)'라는 문구를 근거로 '검은 바탕 금박 글씨'로 바뀌게 됍니다.. 현판 거는 시기는 2020년 이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보물 제383호 _ 창덕궁 돈화문 (昌德宮 敦化門)

 

수   량 : 1동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시   대 : 조선시대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보물 제 383호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원년)에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다.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오를 알리기 위해 북을 치는데 이것을 오고(午鼓)라고 하며, 인정은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해 28번 종을 치는 것이고, 파루는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33번의 종을 치는 것을 말한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고,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 이다. 중앙은 어문으로 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문은 당상관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지만, 3사(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게 한 특별한 혜택이 있었다.

 

보물 제384호 _ 창경궁 홍화문 (昌慶宮 弘化門)

 

수   량 : 1동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시   대 : 조선시대  

 

창경궁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 덕수궁 대한문입니다.

 

덕수궁 대한문(大韓門)

 

 

인화문 현판 _ 개관시기 1896~1902년, 나무 351.5×122.0㎝

 

인화문(仁化門)

 

경운궁 남쪽에 위치하여 본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문이다. 민병석(閔丙奭, 1858~1940년)에게 인화문 현판의 글씨를 담당하도록 하였다는 1896년 11월 관보 기사로 보아 1896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할 때 인화문을 거쳐 궁으로 들어갔다. 같은 해 11월 명성왕후 장례 때 고종이 인화문 밖에 나아가 곡으로 연결하였고, 장례 행렬도 인화문을 통과하여 궐 밖으로 나가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향했다. 하지만 1902년 경운궁 법전(法殿)인 중화전(中和殿)과 그 문인 중화문(中和門)건립을 위해 궁궐 영역을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철거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

 

대안문 현판 _ 개판시기 1899~1906년, 나무 347.0×124.0㎝

 

대안문(大安門)

 

경운궁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건립시기는 1897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경운궁 중심으로  도로를 정비하고 새로운 도로를 개설함에 따라 1900년경 대안문은  도로가 모여들고 접근이 용이한 한성의 중심지로서 인화문(人化門)을 대신하여 점차 경운궁의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00년에 월대가 갖추어졌고 1902년 인화문이 철거하자 정식으로 경운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4년의 대화재 이후 경운궁 중건이 마무리되어가던 1906년 수리를 마친 후 4월 25일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 경희궁 흥화문입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_ 경희궁흥화문 (慶熙宮 興化門)

 

수   량 : 1동

지정일 : 1974.01.1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시   대 : 조선시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건립하고자 궁내의 많은 전각을 헐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일제는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해방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 자리는 동향을 보고 배치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찾기 힘들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다포 양식 건물로, 정전인 숭정전, 황학정과 더불어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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