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북도

진천 배티성지_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기리여원 2022. 10. 8. 11:07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 _  진천 배티 성지 (鎭川 梨峙 聖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인 조선교구신학교 터

 

수량/면적 : 3개소, 일원(6필지 2,197㎡)
지정일 : 2011.06.04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로 708 (백곡면)
시   대 : 1850~1860년대

 

진천 배티 성지[鎭川 梨峙 聖地]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성지로 박해를 피해 숨어들은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1830년대에 敎友村이 형성되었으며, 1850년에는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한국 성명 安敦伊) 성인 주교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朝鮮敎區神學校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두 번째 신부인 崔良業(1821~1861년, 세례명 : 토마스) 신부를 비롯하여 프랑스 선교사 프티니콜라(한국 성명 朴德老) 신부와 페롱(한국 성 權) 신부가 1853년부터 1864년까지 배티 신학교 건물을 聖堂 겸 司祭館으로 삼았고, 1866년의 丙寅迫害 때에는 수많은 순교자가 배티와 인근 지역에서 탄생하여 殉敎者 墓에 안장되었다.

배티 성지에는 배티 성당[梨峙 聖堂]을 비롯해 周邊 地域은 天主敎 迫害期에 敎友村으로 形成되었으며, 殉敎者 墓들이 이 곳 저 곳에 位置하고 있다. 이 성지는 1958년부터 청주교구 관할이 되었으며, 1977년부터 청주교구장에 의해 성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1978년에 순교자묘가 단장되었고, 1997년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이 건립되었다.

2001年 2칸 규모의 木造草家로 再現한 朝鮮敎區神學校와 神學校 우측에 殉敎者 劉데레사墓가 있다.

훼손되지 않은 迫害期의 天主敎 敎友村터인 삼박골 敎友村터와 殉敎者 墓로 無名 殉敎者 14人 墓와 殉敎者 劉데레사 墓, 삼박골 母女 殉敎者 墓, 無名 殉敎者 6人 墓, 데레사 남편 殉敎者 墓도 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인 조선교구신학교 터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 그리고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를 지정 범위에 포함하였다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당 겸 사제관 표지판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입구

 

배티성당 입구에서 안성방향으로 500m 올라오면 우측에 신학교가 위치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 동상 및 신학교 담장

 

 

최양업  토마스 신부 동상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최양업(1821~1861년) 신부님이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번째 사제입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복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1836년부터 1849년까지 13년 동안 중국 마카오와 필리핀의 롤롬보이, 만주의 조바차츠(소팔가자) 성당 등지를 전전하며 사제의 꿈을 키웠습니다.

   1849년 4월 15일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님은 차쿠 성당(현 랴오닝성 좡허시 룽화산진)에서 7개월 동안 사목한 뒤 귀국했습니다. 그런 다음 11년 6개월 동안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사는 교우들을 순방하기 위해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면서'예수 그리스도의 용병한 군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최양업 신분님은 결국 과로에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1861년 6월 15일, 만 40세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분의 시신은 진천 공소에 가매장되었다가 체천 배론으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1853년 여름부터 약 3년 배티 교우촌을 활동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글을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한글 「천주가사 」를 지어 전하였습니다.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 』와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 』도 번역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 표지판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성당 겸 사제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배티 교우촌과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배티' 는 배나무 고개 [梨熾(이치)]라는 뜻입니다. 고개 여기저기에 돌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박해시대 이곳에 비밀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였고, 1837년 5월에는 나 모방(베드로) 성인 신부님의 방문과 미사집전으로 '배티 공소'가 설정되었습니다.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를 거쳐 1866년의 병인대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이 지역의 교우촌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배티와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잘골, 동골, 발래기, 새울, 지장골 등 기록에 나타나는 교유촌만 해도 열다섯 곳이 넘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카타콤바(비밀 교우촌)! 오죽하면 윤의병(바오르) 신부가 박해 소설 『은화(隱花, 숨은 꽃) 』의 주요 무대를 이곳으로 정했겠습니까?

*카타콤비 : 초기 그리스동인들의 비밀 교회요 지하 묘지. 로마의 카타콤비가 유명하다.

 

안 다블뤼(안토니오) 성인 주교님은 아직 신부였을 때인 1850년 고 페레올(요한) 주교님의 명에 따라 '한국 천주교 최초의 소신학교'를 설립하고, 배티 교우촌 안에 방 두 칸짜리 신학교(성당 · 사제관 겸용)를 마련했습니다.

1853년 여름에는 다블뤼 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신부님이 신학교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는 세명의 신학생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신학교는 문을 닫지만, 배티 사제관에는 최양업 신부님, 박 프티나콜라(미카엘) 신부님, 권 페롱(스타니슬라오) 신부님 등이 오랫동안 거처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우측면

 

1850년 고 페레올(요한) 주교가 설립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건물이자 성당 · 사제관으로, 1853년 여름부터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저술 활동을 한 장소, 현 건물은 2001년 12월 2일에 복원 봉헌됨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좌측면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지붕은 보기드문 초가지붕이다.

 

잠시 기도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전면

 

 

오른쪽은 이성례 마리아(1801~1840)로 최양업 신부의 모친

가운데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생이며 두번째 사제

왼쪽은 최경환 프란치스코(1804~1839)로 최양업 신부의 부친입니다.

 

병인박해 순교자 유(劉) 데레사의 묘

 

2001년 10월 24일

배티 성지 앞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함.

 

유(劉) 데레사의 묘

 

2022.10.02, 진천군 백곡면,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글 문화재청, 배티성지 안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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