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북도

충청북도 기념물 제153호_충주 양능길 · 양여공 묘소

기리여원 2023. 1. 16. 02:17

충청북도 기념물 제153호 _ 충주 양능길·양여공 묘소 (忠州 梁能吉·梁汝恭 墓所), 양능길 묘소

 

수량/면적 : 1곽

지정일 : 2012.01.06

소재지 :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산58

시   대 :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양능길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충주양씨 문중에서 시조로 삼고 있고, 묘소는 형태가 팔각형의 죽절형(竹節形) 모서리 기둥을 새긴 호석(護石)을 두른 특이한 양식이다. 일부 풍화되고 결실된 부분을 보수한 흔적이 있으나, 고려시대 분묘 유적으로 그 유례가 희귀하다.

 

양능길의 15대손 양여공(梁汝恭)은 조선시대 초기의 인물로 급제 후 예조정랑까지 오른 효자로 이름난 인물이다. 양능길과 양여공은 충주지역의 인물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묘소가 원위치에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하나로 묶어 보호할 필요가 있다.

 

충주 양능길·양여공 묘소 표지판 및 배치도

 

 

충주 양능길·양여공 묘소 입구

 

 

양여공 묘소 (梁汝恭 墓所) 전경

 

 

양여공 묘와 부인 여흥민씨 합장묘

 

양여공(梁汝恭, 1378~1431)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경지(敬之), 호는 유정(柳亭). 양무(梁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환(梁煥)이고, 아버지는 양숙(梁肅)이다. 어머니는 윤정신(尹挺莘)의 딸이다.

 

1405(태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올랐다. 문장에 능통하여 중시(重試) 때 이조정랑 김자(金赭)가 양여공의 시권(試券)을 빼앗아 이름을 고쳐 써서 바치니, 장원급제하였다고 한다.

 

1418(세종 1) 병조정랑으로 재직중, 병사(兵事)를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판서 박습(朴習) 등과 함께 장형(杖刑)을 받고 함안에 유배되었다가 1424년 종편(從便: 죄인을 풀어주고 서울 바깥의 원하는 곳에 살게 해줌)되었다. 1431(세종 13) 충주에 있던 중 기생 예성화(芮城花)를 빼앗아, 이에 원한을 품은 유연생(柳衍生)으로부터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고변을 당하였다. 이후 유연생은 위조고발자로 밝혀져 참형을 받았고 양여공은 무고에서 풀려났다. 1433(세종 15)에 병사하였다.

 

양여공 묘소의 혼유석, 상석, 향로석

 

 

양여공 묘소 묘비

 

묘비의 비문이 마모가 심해서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양여공 묘소의  한쌍의 문인석

 

 

양여공 묘소 후경

 

 

▼양능길 묘소로 갑니다.

양능길 묘소는 양여공 묘소에서 100m 위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양능길 묘소 (梁能吉 墓所)

 

양능길(梁能吉)

 

본관 충주(忠州). 탐라국왕 양을나(梁乙那)의 후손으로 충주양씨의 시조이다.

 

양능길(梁能吉)은 고려가 건국되고 후삼국이 통일될 때 공을 세워 삼중삼한대장군에 오르고 예성군에 봉해졌다. 본래 양능길은 제주양씨였으나 예성(중원소경의 별칭)을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후손들이 양능길을 시조로 하고 940(태조 23) 중원소경이 충주로 개칭되면서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양능길은 타고난 품성이 영민하고 비범했으며, 육체적인 힘도 뛰어나서 무장으로서 자질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양능길과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

 

 

양능길 묘소의 상석

 

 

양능길 묘소의 묘비

 

高麗大將軍蘂城君梁公能吉墓碑碣(고려대장군예성군양공능길묘비갈)

 

아래쪽에 위치한 문인석 한쌍

 

 

위쪽에 위치한  문인석 한쌍

 

 

양능길 묘소 후경

 

2023.01.08,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양능길 · 양여공 묘소

글 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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