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제288호 _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수 량 : 1점
지정일 : 1996.05.30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 백제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銘文)의 내용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국보 제288호 _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6]
관산성의 비극
백제사에서 성왕의 업적은 뚜렷하다.
근초고왕이 4세기를 대표한다면 6세기를 상징하는 인물은 성왕이다. 사비로 왕도를 옮긴 후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한 뒤 눈길을 박으로 돌렸다. 551년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신라 ·가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전쟁에서 이겨 숙원을 풀었으나 신라를 끌어들인 점이 불씨로 남았다.
한강 상류 요충지를 장악한 신라는 2년 후 한강 하류의 백제 땅으로 진출했다. 믿었던 우방에 발등을 찍히자 성왕은 분노했다. 대신들의 반대를 뒤로한 채 태자 여창(餘昌)은 대군을 이끌고 충북 옥천으로 향했다. 한성 함락, 백제 멸망과 함께 백제의 3대 패전으로 손꼽을 수 있는 '관산성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처음에는 백제군의 승기를 잡았으나 신라의 지원군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여창이 고전한다는 급보에 성왕은 군사 50여 명을 대동한 채 전장으로 향하다 사로잡혀 죽었고, 시신 가운데 머리는 신라 궁궐 계단 아래에 묻혀 뭇사람에게 밟히는 치욕을 당했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좌평 4명과 3만에 가까운 장졸을 잃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창은 부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즉위 후에도 오랫동안 은둔 세월을 보냈다. 그 무렵의 창왕에 관한 자료가 1995년에 공개됐다. 충남 부여 능산리의 한 절터에서 발굴된 사리감(舍利龕)에 '창왕의 누이가 부처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학계에 이곳을 성왕의 명복을 빌던 능사(陵寺) 터로 추정하고 있다.
관산성 패전은 백제에서 뼈아팠다.
패전 원인 중 왕의 '무모한 행차'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 도약하려던 백제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관산성의 비극'이라 부를 수 있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균형추는 급격히 신라로 기울었고, 백제는 끝내 주도권을 되찾지 못했다.
2019.09.04.수요일, 조선일보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_ 백제, 부여 능산리 절터, 1995년 발굴.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로, 부여 능산리사지의 목탑 심초석위에서 발견되었다.
감실 앞면 오른쪽에는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왼쪽에는 ‘丁亥妹□公主供養舍利(정해매□공주공양사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 13년(567년)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창왕은 위덕왕의 휘(諱)로, 사비를 천도한 성왕의 아들로서 554년 왕위에 올랐다. 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감이 목탑지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 절의 성격이 왕실의 원찰(願刹), 특히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고 바로 옆에 위치한 왕릉을 관리한던 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옆면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후면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옆면
2015.09.29, 국립부여박물관
글 문화재청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문화재 > 국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국보 제76호_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0) | 2015.11.07 |
|---|---|
| 국보 제9호_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2015.09.29.화요일) (0) | 2015.10.10 |
| 국보 제307호_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백화산(284m) (0) | 2015.10.05 |
| 국보 제287호_백제 금동대향로 (0) | 2015.10.03 |
| 국보 제78호, 국보 제83호_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0) | 2015.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