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491호_영주 금성대군 신단

기리여원 2020. 12. 29. 15:48

사적 제491호 _ 영주 금성대군 신단 (榮州 錦城大君 神壇) 

 

면   적 : 2,654㎡

지정일 : 2007.10.30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 일원

 

금성대군신단은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에 탕평정치의 움직임이 활성화됨에 따라 국왕에 대한 의리가 다시금 강조되는 정치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당대 왕조의 인신(人神)을 위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 표지판

 

 

영주 금성대군 신단 입구

 

 

영주 금성대군 신단 시주문

 

 

영주 금성대군 신단 일각문

 

 

제실

 

 

전사청

 

 

영주 금성대군 신단 우측 소나무

 

 

영주 금성대군 신단 좌측 소나무

 

 

일각문에는 금성단(錦城壇)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

 

금성대군(1426~1457)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다.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다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지역 사족(士族)들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사전 밀고로 발각되어 거사를 도모했던 사람들과 함께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숙종연간에 금성대군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단(壇)을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사이공보흠지위(府使李公甫欽之位)

 

 

제의사지위(諸義士之位)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금성대군지위(金城大君之位)

 

 

영주 금성대군 신단

 

조선 세조 2년(1457)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성삼문 등  사육신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 및 고향의 유림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하게 되는데. 이곳은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

단종 복위가 실패하자 순흥부는 없어졌다. 그 후 숙종 9년(1683)에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 의사 원한이 풀리자 숙종 19년(1693)에 부사 정충창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당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을 쌓았고, 숙종 45년(1719)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삼단으로 고쳐 쌓았다.

그 후 영조 18년(1742)에 경상감사 심성희가 서쪽으로 30~40보 옮겨 단소를 정비하여 순의비(殉義碑)를 세우고, 관리사를 지어 매년 봄 · 가을로 향사를 지내 오고 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 귀향을 간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둠

 

사적 제491호 _ 영주 금성대군 신단 (榮州 錦城大君 神壇) 

 

영주 손흥면 

글 문화재청.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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