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532호_상주 옥동서원

기리여원 2020. 10. 30. 15:17

사적 제532호 _ 상주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면   적 : 4,545㎡

지정일 : 2015.11.10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수봉2길 29 (모동면)

시   대 : 조선시대

 

상주 옥동서원은 고려 말 3명의 국왕과 조선 초 4명의 국왕을 모신 충신으로 조선 초 유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유교 숭상 정책을 주도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인 방촌 황희 (尨村 黃喜, 1363∼1452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옥동서원은 1518년 횡당(黌堂)을 세워 황희의 영정을 모신 것이 효시로, 1580년 백옥동 영당(白玉洞 影堂)이 건립되면서 황희를 배향(配享, 신주를 모심)하였다. 1714년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전식(全湜, 1563~1642년)을 배향하였으며, 1786년 황효헌(黃孝獻, 1491~1532년)과 황뉴(黃紐, 1578~1626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789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현재의 명칭인 ‘옥동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옥동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황희를 모신 서원으로는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아 오늘날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황희 등 4현(황희‧전식‧ 황효헌‧황뉴)의 향사(享祀, 제사)가 전승되어 오고 있다.

옥동서원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인 문루(門樓, 청월루), 강당(講堂, 온휘당), 사당 (祠堂, 경덕사)은 일직선 상에 놓여 있으며,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없고 지원 시설들도 비교적 적다. 이러한 점은 강학(講學, 학문을 닦고 연구함) 기능이 약화되고 향사 기능이 점차 강화되던 17~18세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옥동서원은 황희 선생 영정 3점,「방촌선생문집」,「반간집」,「황씨세보」,「장계이고」,「만오집」등 총 5종 241책의 책판을 비롯하여 각종 고문서 300여 건, 현판 11개 등의 많은 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상주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청원루(淸越樓)

 

옥동서원 청월루는 ‘옥동서원문루상량문’ 기록에서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옥동서원은 동ㆍ서재를 두지 않고 청월루 상층에 온돌방인 ‘진밀료(縝密寮)’, ‘윤택료(潤澤寮)’를 둬 기숙사 기능을 겸하게 하는 독특한 건축 배치가 특징이다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청원루(淸越樓) 아궁이

 

아궁이 위에는 진밀료(縝密寮)가 위치해 있습니다.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청원루(淸越樓) 아궁이

 

아궁이 위에는 윤택료(潤澤寮) 가 위치해 있습니다.

 

회보문(懷寶門)

 

 

회보문(懷寶門) 편액

 

출입문의 루명(樓名)은 회보(懷寶)이다. 회(懷)는 가슴에 품는다는 뜻이니 보배를 품고 이 문을 출입한다는 뜻임.

 

상주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청원루(淸越樓) 후면

 

 

상주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청원루(淸越樓) 후면

 

 

상주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청원루(淸越樓) 후면

 

 

청원루(淸越樓) 내부

 

 

청원루(淸越樓) 편액

 

입제 정종로의 "청월루기" 중에서

 

서원과 그 동내는 이미 모든겄이 옥으로 이름을 지었으니 나머지도 그런 의미를 고려하여 부르는겄이 좋겠다. 비록 연승의 보배와 조승의 보배(구슬의 광체가 멀리 비춰 수레 여러체의 앞을 볼 수 있다는 말)를 가지고도 비유하기 어려운즉 옥으로 부르는 겄이 잘못된 겄은 아니리라.

군자의 덕을 가지고 옥에 비유하고 도를 칭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말이 배위된 여러분들도 규장장처름 아름다운 명암이 있으니 그 빛나는 자질과 장쾌한 본성은 명당에 오르고 청조에 나아간 사람과 견주어 아름다움이 같으니 그 의미는 더더욱 불가능하지 않으리리

 

윤택료(潤澤寮)

 

 

윤택료(潤澤寮) 편액

 

서요(西寮)는 윤택(潤澤)이니 공부를 진밀(縝密)히 하여 몸과 마음을 윤택하게 한다는 뜻임.

 

진밀료(縝密寮)

 

 

진밀료(縝密寮) 편액

 

루(樓)의 상층에 동요(東寮)는 진밀(縝密)이니 공부를 세밀하고 상세하게 한다는 뜻임.

 

옥동서원(玉洞書院) 강당인 온휘당(蘊輝堂)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1518년(중종 13)에 에조참판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황맹헌(黃孟獻)과 홍문관 수찬인.황효헌(黃孝獻)이 모동면 수봉리 신덕촌에 방촌 황희(黃喜)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독서하던 백화서당이 옥동서원의 모태이다.

이후 1580년(선조 13)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봄.가을에 향사(享祀 : 제사)를 지내왔다. 1714년(숙종 40)에 전식(全湜)을 추가 배향(配享)함과 동시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783년(정조 7)에 황뉴(黃紐)를 추가 배향하였다. 1789년에 옥동(玉洞)이라 사액(賜額)되어 선현 배양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이 서원은 1863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카의 경덕사(景德祠), 5칸의 강당, 5칸의 문루(門樓), 3칸의 전사청(典祀廳), 고사(庫舍)2동, 화직사(火直舍), 묘직사(廟直舍) 등과 부속건물로 팔각정이 있다.

묘우(廟宇)인 경덕사에는 4분이 모셔져 있는데 방총 황희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서 사서전식 · 축옹 황효현과 반간 황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협실로 되어 있는데 남쪽은 착로재, 북쪽은 탁장재(琢章齋), 마루는 온휘당(蘊揮堂)이라 현액되어 있다.

문루는 2층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懷寶門)이라 현액되어 있고, 위층 남쪽은 진밀료((縝密寮), 북쪽은 윤택로(潤澤療), 중간의 마루는 청월루(淸越樓)라 현액되어 특이한 건무루조를 나타내고 있다.

옥동서원은 사적 제5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3월 상정(上丁 첫번째 丁一)과 9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유물로는 황의의 영정등이 있고, 소장 전적으로는 갈천문집(葛川文集)외 수백권이 있다.

 

옥동서원(玉洞書院) 편액

 

영남의 사람들이 옥동서원 편액을 청한소에 대한 정조의 비답

 

익성의 서원에 아직도 액자가 누락되어 있음을 어찌 흠결중의 흠결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예문관 제학으로 하여금 액자를 지어 올리고 액자를 보내는 날에는 근시를 보내어 제를 올리도록 하라. 그 제문은 내가 손수 짖겠다라 하여 예문관 제학 신 이병모가 옥동. 덕봉. 도계 등 세 가지로 가정하여 올렸든바 옥동으로 낙점되었다. 좌승지 남태온을 보내 영당에 유제하였다.

 

조 13년 기유(1789) 1월 22일(기묘) 황희의 서원에 '옥동'이라는 편액을 내리다.

 

온휘당(蘊輝堂) 편액

 

당호(堂號)는 온휘(蘊輝)이니 아름다운 옥(玉)은 감추어도 빛난다는 뜻

 

전사청

 

서원 향사시 제물을 봉치하여 두는 건물로 묘우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내삼문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434녕이나 된 배롱나무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배양인물는 방촌 황희 (尨村 黃喜, 1363∼1452년), 사서 전식(沙西 全湜, 1563~1642년), 축옹 황효헌,황효헌(蓄翁 黃孝獻, 1491~1532년), 반간 황뉴(槃澗 黃紐, 1578~1626년)등 4분이 모셔져 있습니다

 

경덕사(景德祠) 편액

 

사우(祠宇)는 경덕(景德)이다. 시경(詩經)에 경(景)은 크다는 뜻으로 많이 나오니 대덕(大德)이라는 뜻과 같으며, 또는 경앙(景仰)으로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도 쓰이니 큰 덕을 가진 어른을 우러러 모신다는 뜻도 될 것이며, 대덕의 현인들을 경모(景慕)한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될 것이다.

 

상주 옥동서원 (尙州 玉洞書院)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남한 36개, 북한 11개입니다.

남한의 36개중 34개를 답사히여 2개만 남았습니다.

연내 마무리가 되겠습니다.

 

2020.10.25.일요일, 상주 옥동서원

글 문화재청, 백화산 문화재 지킴이단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