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83호 _ 나주목 관아와 향교 (羅州牧 官衙와 鄕校), 대성전
면 적 : 73,799㎡
지정일 : 2007.07.31
소재지 : 전남 나주시 금계동 일원
시 대 : 조선시대
나주는 삼국시대 때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큰 읍치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상당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
나주 관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성읍지, 여지도, 나주목지도를 비롯한 고지도 등에서 위치와 건물 구성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으며. 객사 등의 발굴 성과와 옛 사료들을 토대로 조선시대 지방통치 중심지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할 때, 현존하는 관아 건물이 좌표축의 구실을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나주 향교는 평지에 들어선 전묘후학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며, 특히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은 그 규모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후기 향교건축을 대표할 수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나주향교는 조선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까지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육과 제사의 고유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적 제483호 _ 나주목 관아와 향교 (羅州牧 官衙와 鄕校), 금성관
▼ 나주 향교입니다.
나주향교 외삼문과 머릿돌
나주향교 표지판
나주 향교 내삼문(內三門)
보물 제394호 _ 나주향교 대성전 (羅州鄕校 大成殿)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나주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세워 제사와 교육기능을 수행하다가 신학제 실시 이후로는 제사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기둥 사이에는 꽃모양의 받침을 만들어 위에 있는 부재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평면과 세부기법에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향교 대성전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며, 서울문묘·강릉향교·장수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향교문화재이다.
나주향교 대성전
나주향교 대성전
나주향교 대성전
나주 향교 비석군
나주 향교 충효관(忠孝館)
▼ 나주 금성관입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6호 _ 정수루 (正綏樓)
조선 선조 36년(1603)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이 지은 것으로, 나주의 관아문 구실을 했던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1층 양 옆은 벽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개방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2층에는 한때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매달아 놓았던 북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 망화루(望華樓)
금성관(錦城館)은 조선시대 성종 임금 때 나주목사 이유인(재임: 1487. 04. 12.~1489)이 망화루와 함께 세운 객사1) 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양식의 건물이다
나주목 객사 중삼문과 박석이 깔린 삼도
나주목 객사 금성관 중삼문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의 중간에 있는 출입문
나주목 객사 금성관 전경
보물 제2037호 _ 나주 금성관 (羅州 錦城館)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다. 객사는 관할사가 관할 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使臣)이 묵던 곳이다. 특히 정청(나주목은 금성관)에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즉 사신을 접대하고(待實客), 왕정의 위덕을 펴서(宣城德),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嚴官府) 곳이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04.12~1489.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김개목사가 1617년 4월 21일에 중수하고1775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하다가 1963년 보수를 거쳐 1976년 전부 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은 복원 정비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 · 서익헌을 복원(2004~2008)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주 금성관 (羅州 錦城館) 전경
나주 금성관 (羅州 錦城館) 전경
금성관 뒤에 보호수로 지정된 650년된 은행나부 2그루
나주목 객사 마당에 있는 우물
나주목 객사에 있는 비석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 _ 사마비 (駟馬碑)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이 쳐들어오자 왕은 수도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이곳 나주에서도 10여일 동안 머무르는 일이 있었다. 왕이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그 때부터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고을 현감이 이 다리를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비를 세워 놓았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 _ 금성토평비 (錦城討平碑)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운동이 터졌을 때, 관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나주목 객사 중삼문과 망화루
2021.01.17, 나주 향교와 금성관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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