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33호_남해 충렬사

기리여원 2021. 6. 5. 09:32

사적 제233호 _ 남해 충렬사 (南海 忠烈祠)

 

면    적 : 12,582㎡

지정일 : 1973.06.11

소재지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순국 후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모셔졌던 곳에 세워진 사당으로 묘비와 가묘가 있다.

 

남해 충렬사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원진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렬'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 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1633년(인조 11) 김여빈, 고승후 등 유림들이 옛터에 초옥 1칸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직한 지 60년이 되던 1658년(효종 9)에 어사 민정중(閔鼎重)이 통제사 정익(鄭榏)에게 명하여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1663년(현종 4)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의 친필로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유명조선국삼도군수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有明朝鮮國三道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가 사당 곁에 있다. 비문은 1661년(현종 2)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1663년에 박경지, 김시성 등이 세운 것이다.

1643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졌기 때문에 1633년 남해현령 이정건(二廷楗)이 세운 충무공비를 철거하고 1793년 5대손 이명상이 이충공비를 다시 세웠다.

1726년 노량서원을 개원했으며, 1746년 사당 곁에 호충암(護忠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 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1760년 5대손 통제사 이태상(李泰祥)이 청해루를 짓고, 1769년 6대손 이한응(李漢膺)이 비각을 중수하고 사우를 단청하는 등 후손들이 충렬사의 중건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렬사는 훼철되었다. 이때 위패는 본당 뒷편에 묻고 제기는 향교로 이관했으며, 토지는 매각했다. 충렬사에는 비각만 남게 되었다.

그 후 1899년 11대손 이민승(李敏承)이 비각을 중수하고 1921년 남해사람인 박진평과 정민주가 비각을 중건하고 이듬해 보존회가 조직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경내에는 비각 · 내삼문 · 외삼문 · 관리사 청해루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다.

1949년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쓴 충렬사 한글비의 비명은 "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한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라고 되어 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내삼문에 충렬사(忠烈祠)와 비각에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남해 충렬사 (南海 忠烈祠) 표지판

 

 

남해 충렬사 (南海 忠烈祠) 표지석

 

 

자암 김구 유허추모비와  삼도통제사 이태상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 _ 남해척화비 (南海斥和碑)

 

남해척화비 (南海斥和碑)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이 뜻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자암 김구 유허추모비 _ 군보호문화재 제2호, 조선시대

 

자암 김구 유허츄모비

 

남해에 12년간 유배생활 중 「 화전별곡 」을 지은 조선시대 4대 서예가 자암 김구를 추모하는 비

 

삼도통제사 이태상비

 

 

충렬사로 오르는 돌계단

 

 

충렬사 내삼문

 

 

충렬사 내삼문

 

 

충렬사 내삼문 현판

 

충렬사에는 외삼문, 내삼문, 사당에 충렬사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전북 부안출신인 조선말 ·근대서화가 추당(秋堂) 박호병(朴好秉, 1878~1942)의 글씨입니다.

 

충렬사 한글비

 

1949년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쓴 충렬사 한글비의 비명은 "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한 데라 여기에 충렬사를 세우니라"라고 되어 있다.

 

관리사이며, 제례를 준비하는 청해루(淸海樓)

 

 

충렬사 내삼문(內三門)

 

 

충렬사 중건비(忠烈祠重建碑)

 

 

충렬사 내삼문

 

 

충렬사 내삼문 현판

 

이 현판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충무이공묘비(充武李公廟碑)

 

 

충렬사 비각에 결려 있는 보천욕일(補天浴日) 현판

 

보천욕일(補天浴日) 은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큰 공훈을 세움을 이르는 말. 중국 신화에서 유래

하였다. 이 현판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입니다.

 

충무이공묘비(充武李公廟碑)

 

사당 앞에는 우암 송시열이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충무이공묘비(充武李公廟碑)가 있다

 

충무이공묘비(充武李公廟碑)

 

 

충렬사 사당

 

 

충렬사 사당 현판

 

이 현판은 1965년에 다시 쓴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이충무공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충렬사 사당내부

 

 

가묘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세워진 충무공비(忠武公碑)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묘(假墓)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 승리로 끌날 무렵인 1598년(선조 61) 음력 11월 19일 아침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군하였다. 장군의 주검은 관음포를 출발하여 이 곳 충렬사에 잠시 초빈(草殯)되었다가 고금도(古今島)를 거쳐 충청남고 아산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이 가묘는 당시 이순신 장군을 충렬사 부근에 임시로 안치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조성한 무덤이다.

 

충민공비(忠愍公碑)

 

1598년 11월 19일에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1633년에 향인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를 슬퍼하여 초옥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 추모함에 따라 현령 이정건이 충민공비를 세웠다. 1643년에 충무공 시호가 책봉되었고 1658년에 조정에서 사당을 신축함과 동시 충민공비를 매몰하고 이 충무공비를 건립하였다. 1973년에 남해 충렬사가 사적지 제233호로 지정되어 재정비 사업중에 매몰된 충민공비가 발견된 것을 다시 새운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2020.11.02일 촬영한 사진입니다.

충렬사 가을 풍광

 

 

충렬사 가을 풍광

 

청해루의 가을 풍광

2021.05.02.일요일, 남해 충렬사

글 문화재청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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