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좋은 형제
실존한 인물인 고려 말기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살았던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일화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흥호장 이성만과 이순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만은 어머니 분묘를 이순은 아버지 분묘를 지켰다. 3년에 복제를 마치고도 아침에도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녘에는 동생이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였다. 또한 이들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봄, 가을에는 떡을 하여 부모님께 드리고 기쁘게 친척들과 나누어 먹었다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연산군 3년(1497년)에 가방교 옆에 이성민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하여 왕이 정문에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를 기록한 효제비를 세웠는데 1964년 예당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수몰되었다가 1978년 극심한 가뭄으로 예당저수지의 물이 빠지면서 우연히 발견됨으로써 의좋은 형제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의좋은형제 이야기는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벼를 나르다 서로 만나는 내용으로 1964년부터 2002년까지 초등하교 국어 국정교과서에 내용이 실리기도 하였다.
의좋은 형제
이성만 형님
이순 아우
1964년 초등학교 2-2 국어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
의좋은 형제 이야기
의좋은형제 이야기는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벼를 나르다 서로 만나는 내용으로 1964년부터 2002년까지 초등하교 국어 국정교과서에 내용이 실리기도 하였다.
1964년 문교부 국정교과서 국어2-2에 실린 '의좋은 형제'
▼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입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_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禮山 李成萬兄弟孝悌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83.09.29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102
고려 전기의 사람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행과 형제의 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고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형은 아버지 묘를 지키고 동생은 어머니 묘를 3년간 곁에서 지키며 돌보았다. 한가지 음식이 생겨도 형제 중 한사람이 없으면 먹지 않았으며, 아침은 형집에서 저녁은 아우집에서 아침과 저녁을 같이 들었다. 조선시대의 조정은 이 사실을 표창하여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는 길쭉한 비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며, 밑에 있는 받침돌은 후대에 와서 만든 것이다. 비몸에는 왕이 그 뜻을 기려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문앞에 세우던 붉은 문 -)을 세우도록 하였다는 것과 자자손손에게 모범이 되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은 마치 비몸 위에 모자를 씌운 것 같은 모습으로, 꼭대기에 크고 둥근 머리장식을 얹었다.
원래 조선 연산군 3년(1497)에 건립되어 가방교 옆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예당저수지 수몰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표지판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표지석
예산 이성만형제효제각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정면 내부에는 효제각(孝悌閣) 현판이 걸려 있다.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비몸에는 왕이 그 뜻을 기려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문앞에 세우던 붉은 문 -)을 세우도록 하였다는 것과 자자손손에게 모범이 되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후면
예산 이성만형제효제비
2021.06.27.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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