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원

괴산(槐山) 문효사(文孝祠)

기리여원 2021. 7. 19. 18:37

괴산(槐山) 문효사(文孝祠)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산64번지

 

문경공(文景公) 이극감(李克堪, 1427~1465), 정효공(貞孝公) 이연경(李延慶, 1488~1522), 충장공(忠壯公) 이광악(李光岳, 1557~1608) 등 광주이씨의 선현을 모신 사당이다

 

괴산 문효사 전경

 

 

 

문효사 정문인 화산문(華山門)

 

문효사에는 내산문(內山門)이 없으므로 화산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사당인 문효사입니다.

 

문효사 화산문(華山門) 현판

이 현판은 보성 출신 서예가 죽포(竹圃) 조득승(趙得升, 1942~ )선생의 글씨입니다.

 

문효사 화산문(華山門)  후면

 

 

괴산(槐山) 문효사(文孝祠)

 

문효사(文孝祠)에는 문경공(文景公) 이극감(李克堪), 정효공(貞孝公) 이연경(李延慶), 충장공(忠壯公) 이광악(李光岳) 등의 위퍠를 모시고 있다.

 

 

 문경공(文景公) 이극감(李克堪, 1427~1465)

 

* 조선전기 이조참의, 동부승지,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여(德輿). 이집(李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면 대의를 통하였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발탁되었고,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448년에는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아 즉위하자 검상이 되었고, 즉위에 즈음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왕세자가 책봉되었을 때 보도(輔導)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1458년에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460년 북정(北征) 때에는 기무를 관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하였으며, 『치평요람(治平要覽)』·『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을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정효공(貞孝公) 이연경(李延慶, 1488~1522)

 

* 조선전기 선릉참봉, 공조좌랑,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도사 이수원(李守元)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房氏)로 사용(司勇) 방의문(房毅文)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다. 1518년 풀려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해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자손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 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했을 때 재상의 선출이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힘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했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 귀양 간 인물들을 적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워 귀양을 면했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충주 북촌 인근에 거주하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한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한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문하가 되었는데, 노수신(盧守愼)·강유선(康維善)·심건(沈鍵)은 이연경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광안군(廣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팔봉서원(八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충장공(忠壯公) 이광악(李光岳, 1557~1608)

 

* 조선시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아버지는 군수 이호약(李好約)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 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 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김시민을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 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문효사(文孝祠) 편액

 

이 편액은 보성 출신 서예가 죽포(竹圃) 조득승(趙得升, 1942~ )선생의 글씨입니다.

 

괴산(槐山) 문효사(文孝祠) 좌측면

 

 

괴산(槐山) 문효사(文孝祠) 우측면

 

 

괴산(槐山) 문효사(文孝祠) 정면

 

 

이극감, 이연경, 이광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문효사 내부

 

 

정효공(貞孝公) 이연경(李延慶, 1488~1522)과 부인 전주이씨 합장묘

 

 

충장공(忠壯公) 이광악(李光岳, 1557~1608)과 처 여흥민씨의 묘

 

2021.07.18. 괴산 문효사 및 이연경 묘역

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괴산 타임즈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