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전라남도

전라남도 기념물 제50호_김완장군전승유허비

기리여원 2022. 4. 11. 14:24

전라남도 기념물 제50호 _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81.10.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294-2번지

 

유허비는 옛 선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무신인 김완 장군을 기리고 있다.

 

김완(1577∼1635) 장군은 영암 출신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당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방어사 진중으로 가던 중 왜적을 만나 21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이를 기념하고자 고종 24년(1887) 그 후손들과 이곳 주민들이 함께 비를 건립하였다. 1981년 지금의 자리로 비를 옮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김완장군전승유허비 표지판

 

 

김완장군전승유허비 전경

 

 

김완장군전승유허비 출입문

 

 

김완장군전승유허비각 (金完將軍戰勝遺墟碑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출입문

 

 

김완장군전승유허비 

 

김완 전승 유허비는 고종 24년(1887년)에 세워진 장군 김완의 전승 유허비이다.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 1577~1635)

 

본관은 김해. 자는 자구(子具). 아버지는 이성현감 극조(克祧)이다.

 

임진왜란 때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밑에서 활약했으며, 1597(선조 30)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밑에 들어갔다. 이듬해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갔을 때, 아버지를 탄핵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권율의 비장으로 와서 병력을 점검하므로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604년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 남원판관 등을 지낸 뒤, 서울에 가서 다시 한덕수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615(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하고, 고산리(高山里) 첨절제사를 거쳐 절충장군·내금위장·만포첨사·평안도방어사 등을 두루 지냈다. 1624(인조 2) 창성방어사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에서 반군을 격파했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 3등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그뒤에도 부총관·전라우수사를 거쳐 훈련원도정·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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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장군전승유허비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김완 장군이 경상방 어사 진중으로 가던 중 남원(현. 구례군 산동면)에서 왜병과 싸워 승리한 것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세운 전승기념비이다.

 

김완장군전승유허비 

 

 

김완장군전승유허비 

 

 

 "학성군김공전승유허비각(鶴城君金公戰勝遺墟碑閣)'라고 쓰여진 김완장군전승유허비각 (金完將軍戰勝遺墟碑閣) 현판

 

 

김완장군전승유허비 

 

비석의 제목은 '학성군 김공 전승 유허비(鶴城君金公戰勝遺墟碑)' 이며, 비문은 진주의 유학자 소휘면이 지은것이다.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김완장군전승유허비

글 문화재청, 구례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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