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충청남도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_성삼문선생 유허지, 성삼문선생 묘, 성삼문 선생 사당

기리여원 2022. 6. 21. 11:16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 _ 성삼문선생 유허지 (成三問先生 遺墟址)

 

면  적 : 2,640㎡

지정일 : 1973.12.24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매죽헌길 403-12 (홍북읍, 성삼문선생유허지)

시  대 : 조선시대

 

성삼문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이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재위 1418∼1450) 때 집현전의 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단종 폐위에 대해서도 굳은 절개를 지켜 죽임을 당했다.

 

숙종 2년(1676)에 읍사 이량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후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

 

1954년 홍성 고적현창회에서는 제단을 보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전의 제단 자리는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지점에 있으며, 유허비는 약 30m 거리의 마을 앞에 있다.

 

 성삼문선생 유허지 표지판

 

 

성삼문선생 유허지 표지석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4호 _ 성삼문선생 유허비 (成三問先生 遺墟碑)

 

유허비란 옛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전하고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면서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1418∼1456) 선생의 공적을 적고 있다.

선생은 세종 29년(1447)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로 뽑혀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에는 정인지·최항·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반포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자 박팽년, 유응부, 허조, 이개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절의를 지닌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선비로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많은 이들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조선 현종 9년(1668) 선생이 태어난 이곳에 비를 세워두었으며, 현재는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송시열이 지은 글에, 김진상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겼다

 

 

 성삼문선생 유허비

 

 

 성삼문선생 유허지

 

1456년 6월 성삼문(成三問:1418~1456)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1453년 10월 10일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은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이름만 남은 왕 단종은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물려주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던 날, 성삼문은 예방승지로 있었다. 훗날 죽음으로 저항할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주는 임무를 수행했던 기구한 위치였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성삼문은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키는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행사가 있는 6월 1일을 거사일로 삼았지만, 내부자의 밀고로 거사 직전에 주동자들은 체포되었고 대부분 처형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세조는 성삼문을 친히 국문(鞫問)하면서 “왜 나를 배반하였는가”라고 하자, 성삼문은 세조를 ‘나으리’라 지칭하며 왕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라며 끝까지 당당함을 지켰다. 처형으로 삶을 마감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는 훗날 사육신으로 표창되었고, 지금까지 충절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충청남도 홍성군 노은리에는 ‘성삼문선생유허지(遺墟址)’로 지정된 성삼문의 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성삼문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외조부 박첨(朴瞻)의 집이 있던 장소이다. 남단에는 ‘성선생유허비’가 있고, 북단에는 사육신의 위패와 서원의 현판을 매안한 노은단(魯恩壇)이 있다. 숙종 때 성삼문의 생가를 고쳐 사당인 노은사(魯恩祠)를 건립했다. 노은사는 숙종 때 녹운서원, 영조 때 노은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흥선대원군 때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현재는 노은단과 함께 성삼문을 모신 사당인 충문사(忠文祠)가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호국과 충절의 단어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6월에 홍성에 소재한 성삼문의 유적지를 찾아보았으면 한다.

 

                                                                                                                                 글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충문사 외삼문인 충절문

 

 

성삼문선생의 영정 및 위패를 모신 충문사

 

 

충문사 현판

 

 

매죽헌 성삼문 영정

 

 

충문사 전경

 

 

노은단 전경

 

 

단심가 비와 성삼문선생 사적기

 

 

성삼문선생의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어 가셔 무엇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얏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노은단(魯恩壇) 외삼문

 

 

노은단(魯恩壇) 현판

 

 

노은단(魯恩壇) 

 

 

노은단(魯恩壇) 

 

 

▼ 노량진의 사육신 묘입니다.

 

노량진 사육신묘

 

 

성산문선생 묘

 

 

 

▼논산 성삼문선생의 묘입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 _ 성삼문의 묘 (成三問의 墓) 

 

소재지 :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번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1418∼1456) 선생의 묘소이다. 아기를 낳으려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하고 3번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세종 20년(1438)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예기대문언독』을 펴내기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중국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13번이나 다녀오기도 해 한글 반포에 공로가 많았다.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을 잡으면서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의 3등 칭호를 사양하였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과 예조참의, 1455년 예방승지 등의 직책에 올랐다. 아버지인 성승,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미리 발각되어 한강가(지금의 서울 노량진)에서 끔찍한 처형을 받았다.

그의 묘소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며,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쪽 다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 그믐에 선생의 위덕을 기리는 묘제 행사가 거행되며,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성삼문의 한쪽다리성삼문의 묘

 

 

▼ 성삼문선생의 사당인 금남 문절사입니다.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1호 _ 금남 문절사 (錦南 文節祠)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330-5

 

매죽헌 성삼문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성삼문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세종 20년(1438)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서 1446년 10월 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박팽년, 허조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다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문절사는 달전리 부락의 북쪽에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금남 문절사

 

2022.06.14. 홍성군 홍북읍, 성삼문선생 유허지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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