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북도

김시민장군의 사당과 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_괴산 충민사

기리여원 2022. 8. 20. 09:58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 _ 괴산 충민사 (槐山 忠愍祠)

 

수  량 : 1동

지정일 : 1976.12.21

소재지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충민사길 46 (능촌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1544∼1592)과 충숙공 김제갑(1525∼1592)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가 되어 사천, 고성, 김해 등지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명의 병력으로 2만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김제갑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주로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영원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그의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과 함께 순절하였다.

 

선조 때 이분들의 절개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괴산 충민사 표지판

 

 

괴산 충민사 홍살문

 

차량은 진입을 할 수 없습니다.

 

괴산 충민사 전경

 

 

괴산 충민사 전경

 

 

괴산 충민사

 

충민사 (忠愍祠)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김시민장군의 사당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떄 진주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1554~1592)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는 사당으로 능촌리 야산 자락에 위치하며, 입구를 지나 석조계단을 오르면 앞에서부터 자연경사를 따라 외삼문 · 내삼문 · 사당이 일렬로 서 있다.

바깥 사당에는 김시민장군신도비와 박종화(朴鐘和)가 짓고 이상복이 쓴 김시민장군유적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관리사무소 및 해설사의 집

 

 

괴산 충민사 안내도

 

 

괴산 충민사 안내도

 

 

괴산 충민사 표지판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 본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가 회령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 의병장 이달(李達) ·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 · 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浪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명이 진주성을 포기하자, 불과 3,800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1592)

 

충민사 외삼문인 효충문(效忠門)

 

 

충민사 외삼문인 효충문(效忠門)

 

 

김시민장군유적정화기념비(金時敏將軍遺蹟淨化紀念碑)

 

 

왼쪽은 김시민의 신도비와 오른쪽은 김제갑의 신도비

 

 

김시민의 신도비와 김제갑의 신도비

 

왼쪽은 제액(題額)김충무공 신도비명(金忠武公神道碑銘)’으로 김시민의 것이다. 1974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권용직(權容稷)이 지었고, 글씨는 김사달(金思達)이 썼다.

오른쪽은 제액이 의재김선생신도비(毅齋金先生神道碑)’로 김제갑의 것이다. 1976년에 건립되었는데 권용직이 지었고, 12대손 김상형(金相馨)이 글씨를 썼다.

 

충민사 내삼문인 선무문(宣武門)

 

 

충민사

 

 

충민사(忠愍祠)

 

이 건물은 임진왜란때 진주대첩의 주장 김시민(金時敏, 1554~1592)과 김제갑(金悌甲, 1525~1592)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충민사(忠愍祠) 우측면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과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건축물이다.

 

충민사(忠愍祠) 좌측면

 

 

충민사(忠愍祠) 우측면

 

 

충민사(忠愍祠) 현판

 

 

충민사(忠愍祠) 김시민장군 영정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의 묘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의 묘

 

김시민 묘앞의 석조물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무인석 1쌍이 위치에 있다.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의 묘

 

 

김시민(金時敏)의 묘 앞 무인석 1쌍

 

 

효충문에서 바라본 달천의 풍광

 

 

▼구사당입니다

 

구사당으로 올라갑니다.

 

 

구사당 출입문

 

 

구사당(舊祠堂)

 

충민사 동쪽 인접지점에 위치한 구사당(舊祠堂)은 1711.06.16 숙종대왕의 명에 따라 장군의 불천지위사당(不遷之位祠堂)으로 세운 것인데 1871년 원주에 있던 숙부 김제갑(金悌甲)의 사당인 충렬사가 훼철(毁撤)되니 위패(位牌)를 이곳에 함께 배향하고 매년 충민사와 별도로 자손들이 제향하고 있다.

 

구사당(舊祠堂)

 

 

보물 제1476호 _ 김시민 선무공신 교서 (金時敏 宣武功臣 敎書)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에게 내린 선무공신 교서이다.
선무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 10월에 임진왜란 때 전공을 크게 세운 장군들에게 내린 것으로,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총 18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 공신교서는 김시민 장군의 공적과 그에 따른 포상내역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존하는 선무공신교서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임진왜란사 연구와 고문서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38.4 x 287.0cm(본문 37.2 x 222.5cm)

 

2019.01.20, 국립진주박물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_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비로,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리우며, 현재 진주성내에 비각을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문에는 1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의 병력이 왜군 2만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길목이 되던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는 받침대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조선시대 석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광해군 11년(1619)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2019.01.20, 진주성

 

취묵당으로 가는 길, 이곳에서 410m

 

 

충민사답사를 마치고 취묵당으로 갑니다,

'기리여원'에서 취묵당을 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2022.08.15. 괴산 충민사

글 문화재청, 전시안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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