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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_서산 김적 및 김홍욱묘역

기리여원 2023. 12. 31. 18:23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 _ 서산 김적 및 김홍욱묘역 (瑞山 金積 및 金弘郁墓域)

 

수    량 :  무덤 2기, 신도비 1기

지정일 : 2010.12.30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대로화곡길 50-13 (대산읍)

 

김적묘는 언덕 경사면에 자연 석축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장대석으로 구획한 계체석 위쪽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음. 향하여 오른쪽에 묘표석이 있으며 그 아래쪽 양쪽에 망주석과 동자석, 문인석이 서 있고 묘표석의 머리는 용조각과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아들 홍욱이 주관하여 세웠으며 포저 조익이 찬하였음. 문인석은 화려한 금관조복형으로, 조각솜씨가 뚜렷하며 석물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음.

 

김홍욱묘는 자연석축을 쌓아 묘역을 만들고, 위에서부터 날개가 달린 봉분 앞에 상석, 그 아래로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쌍이 있음.

 

묘역 입구에 1772년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비명은 1674년에 장자 세진(世珍)이 덕원에 유배 중이던 우암을 방문하여 받아두었다가 1746년 박필주(朴弼周)가 묘지명을 완성하고 이재(李縡)가 신도비명 후기를 찬한 것을 1772년 5세손 구주(龜住)가 세웠음.

 

김적 및 김홍욱묘역 표지판

 

 

김적 및 김홍욱묘역 표지판

 

 

鶴洲金弘郁先生遺蹟址(학주김홍욱선생유적지) 표지석

 

 

최근에 만든 신도비 및 학주김홍욱선생연보비

 

 

신도비 

 

 

신도비 

 

 

서산 김적(뒤) 및 김홍욱묘역(앞) 전경

 

 

▼서산 김홍욱묘역입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 _ 서산 김홍욱묘역 (金弘郁墓域)

 

문정공(文貞公 ) 김홍욱 (金弘郁, 1602~1654)

 

김홍욱(金弘郁, 1602 6 25(음력 5 6)~ 1654 8 27(음력 7 16))은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자는 문숙(文叔)이고 호는 학주(鶴洲)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635(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과 예문관,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했으며, 1637년 암행어사로 강원도에 다녀온 뒤 홍문록에 뽑혔다. 이후 1645년 훈신 김자점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다가 홍문관에 복직, 효종 즉위 후 사헌부집의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649(효종 즉위) 김자점의 사치와 사리사욕을 탄핵하고 사직했으나, 주변의 변호로 복직하였다. 1649년 인조의 만장을 쓰다가 신하들의 잘못 보도를 지적한 구절이 문제시되어 파면됐으나, 이경석 등의 변호로 복직,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1650년 홍문관 부응교, 의정부 사인, 응교, 실록청 도청낭청이 되다. 1651년 장악원정, 부묘도감 도청낭청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고,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지제교를 겸했다. 1654년 홍청도(현재의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충청도 관찰사 당시 대동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감염철소(請減鹽鐵疏)를 올려 염전업자에 대한 세금 감면을 청원하였으며, 잠곡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다.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과 사면, 복권을 주장했다가 효종에 의해 장살되었다. 그가 죽자 송시열, 송준길과 남인의 당원 허적, 홍우원 등도 그의 사면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번 올려 복권되었다. 숙종 때 민진후의 상소로 증 이조판서 겸 홍문관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됐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5대조이자, 영조 때의 영의정 김흥경의 고조부이며,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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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묘역 (金弘郁墓域)

 

김홍욱묘역의 석조물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 1기,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이 위치해 있다.

 

김홍욱묘역 (金弘郁墓域)

 

 

김홍욱묘역 (金弘郁墓域)

 

김홍욱묘역 묘비

 

 

김홍욱묘역 문인석 1쌍

 

 

김홍욱묘역 후경

 

 

▼서산 김적묘역 (瑞山 金積 墓域) 입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 _ 서산 김적묘역 (瑞山 金積 墓域)

 

김적(金積, 1564~164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단구자(丹丘子). 할아버지는 서산 지역에 자리 잡은 경주 김씨 입향조 김연(金堧)이다. 아버지는 증 좌승지 김호윤(金好尹), 부인은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이다. 아들은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 김홍양, 김홍필, 충청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다.

 

김적(金積)[1564~1646]은 어머니의 외삼촌[외외종조부]이자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아버지인 이계(李啓)로부터 이정구와 함께 글을 배웠다. 1609(광해군 1) 사마생원시에 급제한 뒤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거쳐 1613(광해군 5)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탄식하고 사직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서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의 기회가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심지어 월사 이정구가 편지까지 보내 부임을 종용하였지만 어찌 백수의 나이에 소년들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치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는 학문을, 노복에게는 농사에 근면하기를 일깨우고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이곳에서도 후학을 양성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기꺼이 불쌍한 사람을 도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수천 석의 곡식을 풀어 구휼에 힘썼다

 

- 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적묘역 (金積 墓域)

 

김적묘역의 석조물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 2기, 동자석 1쌍,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이 위치해 있다.

 

김적묘역 (金積 墓域)

 

 

김적묘역 (金積 墓域)

 

 

김적묘역 (金積 墓域) 구묘비, 신묘비

 

贈史曺參判金公積之墓 贈貞夫人和順崔氏之墓(증사조참판김공적지묘 증정부인화순최씨지묘)

 

김적묘역 동자상 !쌍

 

 

김적묘역 문인석 !쌍

 

 

김적묘역 후경

 

 

김적묘역에서 바라본 입구 전경

 

2023.10.11,  서산시 대산읍, 김적 및 김홍욱묘역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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