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67호 _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지정일 : 2006.01.02
시 대 : 삼국시대
소재지 : 경기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번지 등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 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 이며 이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되어 있고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9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이다.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함께 사진을 싣고 있으며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기술되어 있다. 그 후 1991년부터 2003년 사이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의 형태는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수직단애 위에 있는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벽의 전체둘레는 성의 가장자리를 따라 재었을때 약 400여m이고,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이며, 동벽은 현재 남아있는 부분이 93m이고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성벽 최정상부는 30m 정도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는 장대(將臺)가 설치되었으며, 성으로 진입하는 문지는 동벽 남쪽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호로고루는 연천당포성, 연천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표지판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표지판
북에서 온 광대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는 2002년 북한에 소재한 국보급 고구려 유물 및 벽화고분을 북한에서 직접 모형으로 제작해 우리나라에 제공한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의 결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민간의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을 주도하며 이 비를 소장하고 있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는 2015년 연천구에 이 비를 무상으로 기증하였으며 연천군은 고구려 기상을 되새기고 남과 북의 통일과 화합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남한 지역을 대표하는 고구려유적인 연천 호로고루 사적 제467호에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홍보관
호로고루를 둘러싼 삼국시대 전쟁사
임진강을 둘러싼 전쟁의 서막
기원 후 4세기까지 임진강 유역은 백제의 영토였다.
임진강 일대는 서쪽으로는 한나라 낙랑군과 영토경계를 하고 있고 동북쪽의 추가령구조곡을 이용해 침입하는 말갈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북방의 요충지로 백제는 일찍부터 임진강을 따라 넓게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으로 백제의 도성이 함락되고 아신왕이 항복함으로써 임진강 일대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는 임진강 일대에 행적구역인 공목달현을 설치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 확보한 임진강지역을 기반으로 남진 경영을 강화하여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아산만에서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군주가 되었다.
삼국시대 DMZ 임진강
서기 551년 신라와 백제 연합군의 기습 공격으로 고구려 남쪽 국경을 지키던 한강의 아차산 방어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고구려는 임진강까지 후퇴하여 남쪽에서 북상하는 신라를 막기 위해 임진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반면 한강지역을 차지하고 북상한 신라는 임진강까지 진출하였으나 견고하게 구축된 고구려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임진강 남쪽의 산 정상부를 따라 일정간격으로 성곽을 세우고 북쪽의 고구려와 대치하였다. 그 후 임진강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신라의 국지전이 끊임없이 발생하였지만 어느 쪽도 임진강 일대를 완전히 차지하지 못하고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120여년 동안 임진강 사이에 두고 군사적 긴장감을 이어가야 했다.
당나라에 맞선 고구려군의 최후 항전
668년 당나라에 의해 수도 평양성이 함락이 되자 고구려군은 영토 곳곳에서 부흥군을 조직하여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반면 평양성을 점령한 당나라는 당초 대동강 이남땅을 신라에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석문에서 신라군을 크게 이긴 당군은 673년 윤 5월에 대장군 이근행으로 하여금 호로하로 진군하게 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고구려 병사들이 호로고루에 집결하여 배수의 진을 치고 결전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밀려드는 당나라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수천명이 사로잡히고 살아남은 자는 모두 임진강을 건너 신라로 달아나고 말았다.
전쟁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
남쪽으로 진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두보인 호로하를 차지한 당군은 전력을 정비하여 675년 2월 부터 한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인 임진강 남한의 신라 칠중성을 공격하였다. 수 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신라가 칠중성을 지켜냄으로써, 당나라는 칠중성을 우회하여 매초송에 유인궤가 이끄는 20만 대군을 주둔하게 하였다. 같은 해 보급품을 가득 실은 당나라 선단이 임진강 초입의 조강으로 들어왔다.
설인귀는 이곳 지리에 밝은 신라인 풍훈을 길잡이 삼아 은밀하게 접근하였지만 이 정보를 알아차린 신라군이 천성(現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잠복하여 보급선을 궤멸시켰다. 보급로가 끊기자 매초성에 주둔 중이던 당대군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신라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급습하여 매초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이길 수 있었다, 매초성 전투의 패배로 당나라는 2년후인 677년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를 만주 무순으로 옮김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지배야욕를 접게 되었으며 한반도는 부분적이나마 최초의 통일왕조인 통일 신라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매초성은 현재 연천군 청산면 한탄강변에 위치한 대전리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홍보관
사적 제467호 _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연천의 3대성
사적 제467호_연천 호로고루, 사적 제468호_연천 당포성, 사적 제469호_연천 은대리성은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라고 하는 독특한 형태의 성곽이다.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임진강과 한탄강 국경 방어선을 관장하던 군사요새로 고구려 북한에서 제작해 남한에서 전시된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릉비가 전시되어 있다
사적 제467호 _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연천 호로고루는 임진강 장단석벽의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관찰할 수 있는 고랑포 주상절리 적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호로고루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내에서 발견되는 많은 양의 고구려 와편으로 볼 때 비록 규모는 작지만 행정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던 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에는 2016년 개관한 호로고루 홍보관에는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름비가 전시되어 있다.
* 호로고루는 5월에는 싱그러운 청보리가, 6월~10월까지는 해바라기와 코스모스가 가득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싱그러운 청보리
싱그러운 청보리
사적 제467호 _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연천 호로고루(漣川 瓠盧古壘)
연천 호로고루는 임진강에 위치한 고구려의 방어성곽이다. 호로고루가 위치한 고량포 여울목은 임진강 하류역에서 만나는 첫 번째 여울목으로 배를 이용하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곳은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육상교통로가 지나는 지점으로 호로고루는 고구려의 방어선을 관장하던 국경방어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집수시설
집수시설
집수시설 표지판
사적 제467호 _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사적 제467호 _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출처 문화재청, 연천군 문화관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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