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05호_금산 칠백의총(2018.11.04.일요일)

기리여원 2018. 11. 6. 20:35

 

       임진왜란 때 조선선생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인의사의 묘


                                                                                                       사적 제105호 _ 금산 칠백의총(錦山 七百義塚)

 

사적 제105호 _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번지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 1971년 깨어진 조각을 시멘트 등으로 다시 붙여 복원하였으나, 2009년 석재로 재차 복원하고 비각도 새롭게 건립하였다.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6년에 기념관·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사적 제105호 _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안내도

 

 

사적 제105호 _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안내도

 

 

사적 제105호 _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표지판


 

 

 

 



 

 

 

 

 

 

 

 

 

 

 

 

 

 

 

 

 

 

 

 

 

 관리사무실

 

 

의총문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

의병장 조헌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이다. 임진왜란 11년 후 (1603년 4월) 당시 해평부원군이었던 윤근수(尹根壽)가 글을 짓고 김현성(金玄成)의 글씨로 새겨 건립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 "이시까와 미찌오(石川道夫)"에 의해 폭파되었던 것을 주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여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8.15광복 이후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 확장 시 그 폭파된 비를 붙여서 비각을 세우고 보존하여 내려왔다.

2009년 9월에 분리된 상태로 비각 안에 있었던 몸체와 머릿돌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다시 세웠으며, 비의 규모에 맞추어 비각도 목조양식으로 새롭게 개축하였다.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


 

기념관(紀念館)


1976년 건립된 건물로 칠백의사의 전투모습 등 임진왜란 당시의 행적을 그린 7폭의 기록화와 칠백의사와 관련된 유물이 보관·전시되어 있다. 유물은 조헌선생이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교지(敎旨).와 조헌선생이 1574년 명나라를 다녀올 때 손수 쓰신 <조천일기(朝天日記)>, 조헌선생에게 선조(宣祖)와 고종황제(高宗皇帝)께서 내리신<교서(敎書)>, 영조(英祖)의 명으로 발간한 20권 10책의 <중봉전집(重峰全緝)>, 조헌선생의 빛나는 언행과 업적을 간추려 기록한,항의신편(抗義新編) 및 목각판(木刻板)>, 칠백의사를 추모하여 정조(正祖)와 순조(純祖)께서 내리신<제문(祭文)>, 주요 참모였던 이광륜(李光輪)선생의 공을 높여 정조(正祖)께서 내리신<교지((敎旨)>,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선생의 업적과 행적을 수록한 ,제봉문집(霽峰文集)> 등이 있다. 7점의 유물은 1989년 8월 1일 보물 제1007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1007호 _ 선조대왕교서(宣祖大王敎書) 표지판, 복제품


1592년 선조(宣祖)께서 의주(義州)로 피난(避難)하셨을 때 충청도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에게 봉상시첨정(奉常時僉正)의 벼슬을 내리시고 왜적을 하루 속히 몰아내고 국권(國勸)을 회복(回復)해 줄 것을 당부한 내용

 

 

중봉 조헌 영정

 

조선의 문신 의병장, 호는 중봉, 시호는 문열(文烈), 명종 22년(1567) 24세 때 문과에 급제, 교서관, 정주교수(定州敎授)등을 역임하면서 인재양성에 힘쓰고 임진왜란을 맞아 700의병과 함께 금산 연곤평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1974년 작품으로 세로121cm,가로 84cm이며 원본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다

 

향의신편 및 목각판(抗義新便 및 木刻板)


항의신편은 임진왜란(任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純節)하신 조헌(趙憲)선생의 행적과 업적을 수록한 것으로, 4권 1책이며 목각판 107개도 함께 보관되어 있음

 

취의문

 

동입서출(東入西出) : 능,향교, 사당 등의 출입시,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왼쪽)으로 나온다 」는 의미이다.

오른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백송


두꺼운 잎이 3개씩 모아서 나고 특히 퍼져 자라는 줄기가 하얗기 때문에 백송이라 부른다. 

 

종용사(從容祠)


임진왜란 당시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선열들의 영혼을 모신 21위(位)의 위패가 안치되고 있다. 1647년 당시 호서·호남지방의 유림에 의하여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3년 현종께서 '종용사"라 사액하셨다. 1940년 일제의 항일유적 말살정책에 따라 훼손되었다가 1952년 복원되었고, 1971년 재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용사(從容祠)

 


 종용사(從容祠) 위패

종용사에는 칠백의사 이외에 눈벌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선생과 그 막좌(幕佐) 및 사졸(士拙), 그리고 횡당촌(黌堂寸)싸움에서 순절한 변응정(邊應井)선생과 무명의사(無名義士) 등 2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가에서는 매년9월 23일(임진년 음력8월18일 해당)에 칠백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종용사(從容祠) 위패

 

 

  종용사(從容祠) 위패

 

 

종용사

 

 

종용사

 

 

 목련이 꽃이 필려고 봉우리를 맺고 있습니다.

 

 

 

 

 

 

 

 

모과가 노랗게 익습니다. 막 떨어질려고 합니다.

 

 

 

 

 

사적 제105호 _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1592년 8월 18일(음력) 조국강토를 지키기 위해 의병장 조헌선생, 의승장 영규대사 등 칠백의사가 금산 연곤평에서 만오천여 명의 왜적과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조헌선생의 제자인 박정량,전승업 등이 그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

 

 

사적 제105호 _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글 문화재청, 팸플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