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진주성((晋州城)
진주성에 있는 문화재
1. 사적 제118호 _ 진주성
2.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_ 김시민장군전공비
3.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_ 촉석정충단비
4.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_ 쌍충사적비
5.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_ 진주 의암서적비
6.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 _ 진주 의암
7.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_ 영남포정사문루
8.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_ 북장대
9.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_ 창렬사
10.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_ 서장대
11.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_ 의기사
12.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_ 촉 석루
13. 전통사찰 제70호 _ 호국사
사적 제118호 _ 진주성 (晋州城)
지정일 : 1963.01.21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진주성)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사적 제118호 _ 진주성 (晋州城)
진주성 (晋州城)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진주성 하면 우선 임진왜란 3대첩(진주대첮, 한산대첩, 행주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과 의기 논개를 떠올리게 됩니다. 진주성이 호국충정의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진주대첩의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952년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공해 올 때 진주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의 힘을 합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청사(靑史)에 우뚝한 진주대첩입니다.
그러나 여덟달 뒤인 1953년 6월 크게 패한 왜군이 설욕을 노린 10만여 명으로 재침하자 7만 민 ·관 ·군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했습니다. 이에 진주사람들은 성안에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을 세워 진주성에서 목숨을 바친 그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진주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의기 논개입니다. 논개는 왜군의 재침으로 성이 무너지자 촉석추 아래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해 강물에 몸을 던쳐 충절을 다했습니다. 성곽 둘레는 1,760m, 높이는 5~8m, 성안에는 14점의 지정문화재 등 각종 유적이 있습니다
공북문(控北門)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입니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합니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입니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고유하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다.
충무공김시민장군상(忠武公金時敏將軍象)
충무공김시민 장군의 호국충절 정신을 게승하기 위해 건립한 진주성 수호상으로 2000년 1월 1일 제막했습니다. 높이 7m, 면적 255㎥입니다. 김시민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입니다.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이었을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안항 관직을 버렸다가 1591년(선조24) 진주판관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 고성,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했습니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진주목사가 되어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대첩을 이루었으나, 김시민장군은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_ 영남포정사문루 (嶺南布政司門樓)
지정일 : 1983.07.2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73-11번지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영남포정사라고 하였으며,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은 수원 유수를 지낸 서영보가 쓴 것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_ 영남포정사문루 (嶺南布政司門樓)
영남포정사 문루(門樓)는 진주성에 현존하는 최고의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그 전신은 망미루(望美樓)입니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이 2층으로 신축했습니다.
영남포정사 문루 진주목(晋州牧)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고, 고종 32년(1895) 관찰부가 설치될 때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를 뜻하는 말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1896년 진주관찰부가 경상남도총으로 바뀌면서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1925년 도청 소재지가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 역할을 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_ 영남포정사문루 (嶺南布政司門樓)
진주성비석군
▼ 여기서부터는 경절사입니다.
경절사 열일문
경절사 충의당
경절사 수덕재
경절사(擎節祠)
이 곳은 고려조(高麗朝) 충절신(忠節臣) 하공진(河拱辰) 장군(將軍)의 영정과 위퍠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곳이다.
경절사(擎節祠)
경절사(擎節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_ 북장대 (北將臺)
지정일 : 1983.07.2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7번지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북쪽의 높은 언덕에 있으며, 이곳은 서쪽과 북쪽 일대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요충지대이다.
이곳은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서, 낭떠러지 밑의 성밖은 물론 성안과 외성에 주둔한 병사까지도 지휘할 수 있었다. 현판의 이름도 이와 연관하여 진남루, 혹은 공북루라 하였다.
북장대는 임진왜란 때 손상된 것을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새롭게 고쳐 지은 건물이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군사 건물 중에서 조선 중기에 속하는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건물의 모범이 되고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_ 북장대 (北將臺)
북장대는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로 진남루(鎭南樓)라고도 부릅니다. 광해군 10년(1618)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했으며 조선 중기의 다락집 형으로 후대 군사시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북장대는 내성(內城)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낭떠러지 밑의 성밖은 물론이고 성내와 외성(外城)에 포진한 병사까지 지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_ 북장대 (北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_ 북장대 (北將臺)
▼ 여기서부터는 청계서원입니다.
따스함이 스며드는 남천
국보 제105호 _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山淸 泛鶴里 三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시 대 : 통일신하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진주성)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
범허사라고 전하는 경상남도 산청의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41년경 대구의 일본인 골동상이 구입하여 공장에 세워 놓았으나, 1947년 경복궁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바닥돌과 기단의 아래부분은 옮겨 세울 당시 시멘트로 보강한 탓에 원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의 가운데기둥은 2개씩, 위층은 1개씩을 두었다. 특히 위층 기단에는 가운데기둥으로 나누어진 각 면에 8부중상(八部衆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탑신부는 1층 몸돌에 보살상의 모습을 1구씩 조각해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며 각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은 모습이다. 또한 추녀 끝의 치켜올려진 정도가 날카로워 경쾌한 인상을 보여준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의 1층 몸돌에 8부신중 및 보살상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장식탑’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장식적인 조각표현으로 인해 장중하고 소박한 맛을 잃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국보 제105호 _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山淸 泛鶴里 三層石塔)
국보 제105호 _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山淸 泛鶴里 三層石塔)
국립진주박물관
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는 별도로 올립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_ 서장대 (西將臺)
지정일 : 1983.07.2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214-4번지
서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곳이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나오며, 규모는 작으나 진주성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씨가 새롭게 고쳐지은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목조 기와집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_ 서장대 (西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_ 서장대 (西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_ 서장대 (西將臺)
서장대에서 바라 본 남강
▼ 여기서부터는 호국사입니다.
전통사찰 70호 _ 호국사(護國寺)
호국사는 고려 말기에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을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僧兵)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고려 말 처음 건립될 당시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숙종이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최근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一柱門)자리가 발견되어 현재의 문으로 새로 세웠습니다. 그 밖의 사찰 건물들은 모두 최근 새로 조성된 것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며, 전통사찰 제7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은 삼존불을 안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 칠성각 ·종각 ·요사체 ·등이 있고, 대웅전 앞뜰에는 7층 사리탑 2기가 있습니다
▼ 여기서부터는 창렬사입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_ 창열사 (彰烈祠)
지정일 : 1983.07.2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212-8번지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다.
정사호가 세웠으며 조선 선조 40년(1607)에 사당의 이름을 임금이 지어(사액) 내렸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모신 충민사가 없어지자 창열사에 모셨다. 이밖에도 창의사 김천일(1537∼1593), 충청병사 황진(1542∼1606), 경상우병사 최경회(1532∼1593) 등 39분을 모시고 있다.
김시민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고 빼앗겼던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김천일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선조 6년(1573)에 학문이 뛰어나 발탁되었으며 선조 26년(1593)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진격할 때 도왔다.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성은 함락되고 김천일은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황진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5년(1572)에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최경회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으며 진주성 싸움에서 황진, 김천일과 함께 전사하였다
창열사 (彰烈祠)의 외삼문인 유중문(有重門)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1593)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 40년(1607)에 건립된 사액(賜額)사당으로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했습니다. 이곳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忠淸兵使 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慶尙右兵使 崔慶會)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진주성 서쪽에 있는 창렬사는 정사(正祠)인 창렬사(彰烈祠)와 양쪽에 동사(東祠)와 서사(西祠)가 자리하고 정면으로 출입문이 나 있는 ㅁ자형 배치입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임금이 지어 내린 제문의 비가 있고, 왼쪽에는 경충당과 관리사가 있습니다.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진주시 주관으로 39분 배위들의 후손들이 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창열사 (彰烈祠)의 내삼문인 전파문(傳葩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_ 창열사 (彰烈祠)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다.
정사호가 세웠으며 조선 선조 40년(1607)에 사당의 이름을 임금이 지어(사액) 내렸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모신 충민사가 없어지자 창열사에 모셨다. 이밖에도 창의사 김천일(1537∼1593), 충청병사 황진(1542∼1606), 경상우병사 최경회(1532∼1593) 등 39분을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_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지정일 : 1972.02.12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1번지 , 진주성내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제말(?∼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고, 성주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제홍록은 숙부와 더불어 전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휘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등부분에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튀어나온 눈을 강조하여 토속적인 느낌이 든다. 머릿돌에는 서로 엉킨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다. 그 밑면에는 국화무늬를 장식하여 마무리하고 있다. 비문에는 제말장군과 제홍록의 공적을 적어 놓았다.
정조 16년(1792) 이조판서 서유린에게 글을 짓게 하여 비를 세웠다. 일제시대 때 일본관헌에 의해 비각이 헐리어 방치되었다가 1961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비각도 새로 지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_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일명 제씨쌍충비(諸氏雙忠碑)라고도 부르는 이 비는 임진왜란 때 크게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星州牧使諸沫)장군과 이순신장군을 도와 큰공을 세운 제홍록(諸弘祿)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습니다. 제말 장군은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말 장군의 조카인 제홍록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했습니다. 이에 정조 임금이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쌍충각(雙忠閣)이라 이름하여 진주성(晉州城)과 성주성(星州城)에 각각 세우게 했습니다. 본래 이 비는 진주성 안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관헌들에 의해 문산가도(文山街道)에 옮겨졌다가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비각을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_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_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_ 촉석루 (矗石樓)
지정일 : 1983.07.2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현재의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한 것으로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_ 촉석루 (矗石樓)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합니다. 고려 고종 28년(1211)에 김지대(金之垈)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습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까닭'에 누(樓)의 이름을 촉석이라 했다고 전해집니다.
[촉석루기, 하륜]그리고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릅니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루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지만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 성금으로 1960년에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촉석루 현판 중 북쪽의 것은 영조 때의 명필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이 썼으며, 남쪽은 유당 정현복(惟堂 鄭鉉福), 남장대는 은초 정명수(隱憔 鄭命壽)의 글씨이고,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이라는 글씨는 청남 오제봉(凊南 吳濟蜂)의 글씨입니다.
남쪽 촉석루 (矗石樓) 현판
이 현판은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의 글씨임
남장대(南將臺) 현판
이 현판은 은초 정명수(隱憔 鄭命壽)의 글씨임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현판
이 현판은 청남 오제봉(凊南 吳濟蜂)의 글씨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_ 촉석루 (矗石樓)
북쪽 촉석루 (矗石樓) 현판
이 현판은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의 글씨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_ 촉석루 (矗石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_ 의기사 (義妓祠)
지정일 : 1983.07.2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_ 의기사 (義妓祠)
의기사는 조선 선조 26년(1953)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순국한 바위에 새긴 의암이라는 글자는 인조 7년(1629)에 진주의 선지 정대륭(鄭大隆, 1599~1661)이 새겼고, 효종 2년(1651) 양곡 오두인(吳斗寅)은 의암기(義巖記)를 지어 촉석루에 현판하였으며, 경종 2년(1722)에는 명암 정식(鄭式, 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서 「의암사적비」를 세웠습니다.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 1688~1742)가 의가사를 창건하고 '의기논개지위(義妓論介之位)'라는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의암서적비」에는 비각을 세워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달았습니다
의기 논개 영정
의기사에서 바라 본 남강의 풍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_ 진주의암사적비 (晉州義巖事蹟碑)
지정일 : 2000.01.31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진주성내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케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_ 진주의암사적비 (晉州義巖事蹟碑)
의기논개지위(義妓論介之位) 현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_ 진주의암사적비 (晉州義巖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_ 진주의암사적비 (晉州義巖事蹟碑)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 _ 진주 의암 (晋州 義巖)
지정일 : 2001.09.27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논개길 16 (본성동)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이 의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남쪽에는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65m×3.3m이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이 새겨져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 _ 진주 의암 (晋州 義巖)
의암은 임진왜란 때 논개(論介)가 순국한 바위를 말합니다.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29일(음력)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명의 민 · 관 · 군이 순절하자 논개가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습니다. 이에 논개의 의열(義烈)을 기리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기리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즉 의암이리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인조 7년(1629) 정대륭(鄭大隆)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위험한 바위라하여 위암(危巖)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좌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 호 _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우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_ 촉석정충단비 (矗石旌忠檀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 호 _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지정일 :1972.02.12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비로,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리우며, 현재 진주성내에 비각을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문에는 1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의 병력이 왜군 2만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길목이 되던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는 받침대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조선시대 석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광해군 11년(1619)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 호 _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룩한 주인공으로, 이러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石碑)한 것이 바로 김시민 장군 전공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라고도 부릅니다.
선조임금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을 무찔렀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운 인물을 대상으로 상을 내렸는데 김시민 장군은 2등 공신으로 선무공신교서를 내렸습니다. 보물 제1476호로 지정된 김시민선무공신교서는 진주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보물 제1476호_김심민 선무공신 교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 호 _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_ 촉석정충단비 (矗石旌忠檀碑)
지정일 : 1972.02.12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본성동 499-7번지
촉석광장 안의 정충단에 서 있는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과 비몸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머릿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머릿돌이 유난히 커서 전체가 사다리꼴로 보인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밑면에 꽃을 조각하여 이채롭게 장식하였다.
비문은 아래쪽이 닳아서 그 부분만 판독하기가 힘들 뿐 대체로 양호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그 기록이 실려있다. 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 숨진 이들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특히 3장사(三壯士)라 일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을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정충단은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2년(1686)에 마련한 제단으로, 비도 이때 함께 건립되었다. 비문은 이민서가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만중이 썼다. 비의 옆에는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전공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가 함께 서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_ 촉석정충단비 (矗石旌忠檀碑)
촉석정충단비는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12년(1686)입니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해 기술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인잘ㄴ 당시 부친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한 고종후(高從厚),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가에 투신한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의 행적이 기록돼 있으며, 황진(黃進), 장윤(張潤)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비는 임진왜란의 전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비입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_ 촉석정충단비 (矗石旌忠檀碑)
진주성 우물(晋州城水井)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당시부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후기 진주성도에 표시돼 있는 3곳의 우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임진년 진주대첩 당시 진주성의 관군과 백성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됐던 것을 2013년 진주시가 발굴 ·복원했습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축 우물로 14단의 토관과 오수 유입 방지를 위한 둘레돌이 확인돼 근대까지 개조와 재활용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복원된 우물의 크기는 깊이8.4m, 직경1.5m입니다.
진주성 우물(晋州城水井)
진주성 우물(晋州城水井)
진주성 우물(晋州城水井)
글 문화재청, 팸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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