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선사의 얼이 서려 있는 곳
심우장(尋牛莊)
사적 제550호 _ 만해 한용운 심우장 (萬海 韓龍雲 尋牛莊)
수량/면적 : 1동, 88.6㎡(보호구역386.4㎡)
지정일 : 2019.04.08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
시 대 : 일제시대
심우장은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1933년에 지은 집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중국에 망명하여 의병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의 훈련장을 돌면서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명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선생은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등이 있다.
심우장의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 기와집으로, 선생은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심우(尋牛)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이라고 한다
* 2017.04.08일부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에서 사적 제550호로 승격되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 표지판
함께『님의 침묵 』
님의 침묵
학창시절 시험에 단골로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외우고 또 외운 만해 한용운의『님의 침묵 』
근데 못 외워서 다 틀렸습니다.
여기서 70m 오르면 심우장이 나옵니다.
심우장으로 가는 좁은 골목.
만해 심우장은 30일간의 예고 기간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곧 사적으로 등록된다.
아름다운 성북동 북정마을의 풍광
아름다운 성북동 북정마을의 풍광
심우장 전경
심우장 정면
심우장 대문 현판
'심우(尋牛)'란 '소를 찾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일어버린 나(本心)를 찾는다',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적 제550호 _ 만해 한용운 심우장 (萬海 韓龍雲 尋牛莊)
심우장의 유래
한용운은 1933년 벽산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방 두 칸짜리 집을 지어 '심우장(尋牛莊)'으로 이름지었다.
'심우(尋牛)'는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10단계의 과정을 잃어 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용운은 성북동 깊은 산골짜기에 기거하며 '소' 즉 본성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심우'단계로 돌아가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였다.
민족 자조의 공간, 심우장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기거하던 1930년대 중반 이후는 일본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최린, 최남선 등이 친일로 변절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한용운은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가 기거하던 심우장도 민족 자조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한용운은 광복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사적 제550호 _ 만해 한용운 심우장 (萬海 韓龍雲 尋牛莊)
만헤 한용운이 1933년에 지은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독립운동가들이 교류한던 곳으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사적 제550호 _ 만해 한용운 심우장 (萬海 韓龍雲 尋牛莊)
심우장의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 기와집으로, 선생은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심우장 관리사무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연혁
1879.8.29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출생
1905 인제 백담사에서 출가
1907 고성 건봉사에서 최초로 참선 수행
1919 3 ·1운동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참여하여 독힙선언서를 발표, 서대문구의 서대문
형무소 수감
1921 속초 신흥사 승려로 원적을 둠
1926 『님의 침묵』회동서관에서 발행
1933 성북구에 심우장을 지어 정착, 민족지사와의 교류 및 문학활동
1944.6.29 심우장에서 입적, 망우리 묘소에 봉안
민족지사의 교류, 김동삼의 장례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은 이화영, 이시영, 이동년 등과 함께 서간도에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으나 일본의 눈치를 보며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자, 한용운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한용운은 김동산의 관 위에 앉아서 울부짖고 식음을 폐하며 마지막 화장하던 날 빈 속에 술만 마셨다고 한다.
'승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조지훈(1920~1968)은 어려을 적 김동삼의 장례식에 함께 참여하였는데, 이때 조문했던 사람은 약20명 안팎이었다고 언급하였다
심우장 현판
심우장 현판은 한용운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의 글씨임.
묵언(默言)
향로암 야경
전대법륜(轉大法輪) , 복제품
轉大法輪(전대법륜)의 현판은 한용운선생이 말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며 뜻은 ‘거대한 진리의 세계는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저절위(磨杵絶韋) _ 만해 하용운
- 마저 :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등었다.
- 절위 :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져 버렸다.
<오도송(悟道頌)> _ 만해 한용운
1917년 12월 3일밤 10시경 좌선 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읊은 게송
심우장 부엌
심우장 부엌
옛 추억으로 가마솥밥이 그리워 집니다.
처마홈통
2019.02.17,
글 문화재청, 팸플렛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문화재 > 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적 제32호_서울 독립문(2019.03.03) (0) | 2019.03.05 |
---|---|
사적 제448호 강릉 굴산사지(2019.02.24) (0) | 2019.03.02 |
사적 제118호_진주성 (2019.01.20) (0) | 2019.01.27 |
사적 제105호_금산 칠백의총(2018.11.04.일요일) (0) | 2018.11.06 |
김유신장군이 탄생하고 성장한곳! 사적 제414호_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2018.10.07.일요일) (0) | 2018.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