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박물관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

기리여원 2020. 5. 12. 13:35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

 

2020.04.20~09.13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

 

이항복 위성공신 초상(李恒福 衛聖功臣像) _ 작가 미상, 조선 18세기 중반, 비단에 색, 2019년 이근형 기증

 

임진왜란 때 광해군(光海軍, 재위 1608~1623)을 호종한 공으로 1613년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이 되어 받았던 58세 때의 초상을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의 공신은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즉위 후 그 지위를 잃었지만 종가에서는 공신 초상을 소중히 보존했다. 49세 때의 호성공신 초상과 비교하면 흰 수염과 주름이 늘었고 턱선이 부드러워 화가가 노화의 흔적을 잘 포착했음을 볼 수 있다. 그윽한 눈매에 노녀의 지혜가 담긴 듯하다.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전하는 <이항복 초상 초본>은 이 그림과 이목구비가 거의 비슷해 위성 공신 초상 제작을 위해 그린 밑그림으로 볼 수 있다.

이항복의 9대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눈썹을 찡그린 채 만곡(萬斛)의 수심(愁心)을 담고 있으나, 백성과 나라를 위한 걱정이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라고 이항복의 초상에 담긴 정신을 읽었다.

 

유명 조선국 영의정 오성부원군 증시 문충공 백사 이선생 휘  항복 화상

(有明 朝鮮國 領議政 鰲城府院君 贈諡 文忠公 白沙 李先生 諱 恒福 畵像)

 

이항복 호성공신 초상(李恒福 扈聖功臣像) _ 작가 미상, 조선 18세기 중반, 비단에 색, 2019년 이근형 기증

 

이항복은 49세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초상화를 받았다. 백사 이항복 종가에 전해져 온 이 그림은 호성공신 초상을 후대에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공신상은 후손들이 귀하게 보존하였으며 초상이 낡으면 이를 옮겨 그려 다시 모시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항복의 초상은 종가 이외에도 화산서원(花山書院)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모셔졌다.

이항복은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은 관복 차림이다. 흉배의 공작 문양과 서대(犀帶, 코뿔소 뿔 장식 허리띠)는 문관 1품의 지위를 나타낸다.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彩氈, 카펫)이 깔려 있다. 인물의 자세와 복식등은 남아있는 다른 호성공신 초상과도 비슷하다. 음영을 넣어 얼굴을 입체적으로 그린 수법은 초상화를 옮겨 그린 18세기의 화풍이 가미된 것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유명 조선국 영의정 오성부원군 증시 문충공 백사 이선생 휘  항복 화상

(有明 朝鮮國 領議政 鰲城府院君 贈諡 文忠公 白沙 李先生 諱 恒福 畵像)

 

이항복 호성공신교서(李恒福 扈聖功臣敎書) _ 한호 글씨, 조선 1604년, 비단에 먹, 2019년 이근형 기증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를 의주(義州)까지 모신 공로를 기려 이항복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삼는다는 국왕의 문서이다. 오늘날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 교서이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다.

선조의 피란 때 이항복은 도승지(都承旨)로서 국왕을 호위하였고 명의 지원병 요청을 주장했다. 한양을 수복한 후에는 명나라와 긴밀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명의 관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과 일본이 내통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자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오해를 푼 것은 대표적인 업적이다. 여러 차례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정쟁의 뒷바라지를 도맡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체찰사(體察使)로서 삼남지방을 돌며 황폐해진 백성의 삶을 어루만졌다.

 

이세필 초상(李世弼 肖像) _ 작가미상,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2019년 이근형 기증

 

이항복의 증손인 이세필(李世弼, 1642~1718)의 반신상이다. 눈가의 주름과 흰 수염이 노년의 연륜을 보여준다. 복건((幅巾)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은 선비의 차림이다. 이세필은 삼척부사(三陟府使)로서 바른 다스림을 펼쳤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 백성들이 용산서당(龍山書堂)에 사당을 짓고 초상을 모셨다고 전하는데, 오늘날 그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이세필은 환국(換局)으로 어수선한 시대에도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했으며 제례 음악을 정리한 『악원고사(樂院故事) 』 를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문경공 구천 이선생소상(文敬公 龜川 李先生小像)

 

이항복필천자문(李恒福筆千字文)  _ 이항복 글씨, 조선 1607년, 종이에 먹, 2019년 이근형 기증

 

이항복이 여섯 살 손자 시중(時中, 1602~1657)에게 써 준 천자문이다. 붓으로 직접 쓴 천자문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귀중한 유산이다. 해서(楷書)로 한 자씩 공들여 썼으며, 글씨의 골격이 굳세고 획이 날렵하다. 한자 아래에 한글로 쓴 음과 뜻은 조선시대 우리말 연구에도 도움을 주는데 누가 쓴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항복은 전란 극복에 매진하느라 자녀들의 양육에 신경 쓰지 못해 대신 손자 교육에 더욱 마음을 쏟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뒷장에는 손자에게 당부하는 말을 썼다. 이 책에는 이항복의 6대 종손 이경일(李敬一, 1734~1820)이 찍은 「청헌(聽軒) 」과 「월성세가(月城世家) 」라는 인장이 남아있다. 후세 교육에 대한 이항복의 뜻이 시대를 넘어 대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글 국립중앙박물관-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

 

 

▼ 이항복선생묘입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24호 _ 이항복선생묘 (李恒福先生墓)

 

수   량 : 1기

지정일 : 1975.09.05

소재지 : 경기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

시   대 : 광해군 10년(1618)

 

조선 중기의 정승인 필운(弼雲) 이항복(1556∼1618) 선생의 묘지이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이며,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과의 지기와 재치에 얽힌 많은 얘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 13년(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여립 모반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의 호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도승지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몽진을 갔었으며, 그 후 이조참판,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오성부원군 등의 벼슬을 거쳤다.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 김씨를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다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 예장되었으며, 그 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었다. 부인 안동 권씨와의 합장묘로 봉분은 2개이며, 묘비, 상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비탈 아래 약 20m 지점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사당의 오른쪽에는 효종 3년(1652)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이항복선생묘 (李恒福先生墓)

 

 

이항복선생과 부인 안동 권씨의 묘비

 

정경부인 안동권씨 부 의정부영의정오성부원군이선생지묘

(貞敬夫人 安東權氏 祔 議政府領議政鰲城府院君李公之墓)

 

이항복 신도비

 

신도비는 임금이나 2품이상의 관료의 치적을 적은 비로 왕명에 의해 묘소로 가는 길목에 세웠다. 이항복 신도비는 중국 황제가 선물한 운석(雲石) 운남석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에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이 글을 짓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당내 최고 학자로 칭송받는 신독재 김집이 글씨를 쓰고, 우의정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에서 순절한 충신 선원 김상용이 전서(篆書)해 효종 3년(1652)에 세워졌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이항복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 화산서원입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46호 _ 화산서원 (花山書院)

 

수   량 : 1동

지정일 : 1975.09.05

소재지 : 경기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227-40 (방축리)

시   대 : (1635)

 

오성 대감으로 알려진 이항복(1556∼1618)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항복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조참의 동승지 등의 벼슬을 거치고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당쟁의 조정에 힘썼으며 후에 청렴한 관리로서 ‘청백리’에 추대되었다.

인조 9년(1631) 세운 이 서원은 숙종 46년(1720)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화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1971년 지방 유림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인덕각과 동강재, 필운재 등과 출입문인 내·외삼문이 있다. 인덕각은 이항복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 마다 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칸을 넓게 조성하여 제사지내기에 용이한 구조이다. 동강재와 필운재는 강당을 겸한 재실로서 학문을 토론하거나 유림이 모임을 갖는 장소로 쓰고 있다.

 

이항복(1556∼1618)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  화산서원 (花山書院)

 

글 문화재청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