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전라남도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_이상재선생생가지, 월남 이상재선생 전시관

기리여원 2021. 5. 1. 09:33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 _ 이상재선생생가지 (李商在先生生家址)

 

면   적 : 1,434㎡

지정일 : 1990.12.31

소재지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3외 1필

 

조선 후기 사회 운동가인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이상재는 종교가·정치가로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광무 2년(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다.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상재선생생가지 표지판

 

 

이상재선생생가지 표지석

 

 

이상재선생생가지 입구

 

 

이상재생가지 솟을대문

 

 

이상재선생 생가지 전경

 

이상재선생생가지 (李商在先生生家址)

 

조선 후기 사회 운동가인 월남(月南) 이상재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3번지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 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 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 훼손돼 유실되었다

 

 

이상재선생 생가지 사랑채와 외양간 및 창고

 

 

이상재선생 생가지 사랑채와 외양간 및 창고

 

 

이상재선생 생가지 사랑채

 

 

이상재선생 생가지 안채

 

 

이상재선생 생가지 창고

 

 

월남 이상재선생 생가지 장독대

 

 

월남이상재선생추모비(月南李商在先生追慕碑)

 

 

월남 이상재선생전시관

 

민족의식 고취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그리고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온 몸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싸우셨던 이상재 선생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적 132점, 임명장 6점 등 이상재선생이 생전에 사용하셨던 총 244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다

 

월남이상재선생상(月南李商在先生像)

 

월남(月南) 이상재재선생(李商在, 1850~1927)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월남(月南, 1850.10.26~1927.03.29)이며 본명은 계호(季皓)이다.

 

충남 서천군에서 출생한 영원한 청년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은 종교가 · 정치가로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광무 2년(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 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 『청년위국가지기초 』 등이 있다.

 

이상재 선생은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물산장려운동과 절제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셨고 강직한 성품과 신념, 그리고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따뜻한 동포애를 통해 당시 나라를 읽고 방황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길을 밝게 열어 주는 등불이 되어 독립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세계열강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 독립협회 활동과 YMCA운동을 통해서 민족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의 진로를 개척하는데 앞장선 우리민족의 선각자이자 스승이다.

 

월남 이상재선생 전시관 내부

 

 

나라의 거목이 태어나다.

 

 

조선일보 사장 및 신간회 초대 회장이었던 이상재선생.

 

 

* 1927년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재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모심.

 

 

2021.04.26.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이상재선생생가지

글 문화재청, 이상재선생전시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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