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북도

광주이씨 5대 묘역, 충청북도 기념물 제152호_괴산 이연경 묘역

기리여원 2021. 7. 22. 13:43

충청북도 기념물 제152호 _ 괴산 이연경 묘역 (槐山 李延慶 墓域). 이연경의 묘

 

수량/면적 : 1곽

지정일 : 2011.11.04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산 42-3

시   대 : 1548년(조선 명종 3년)

 

이연경 묘역은 조선 중기의 사림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이연경을 중심으로, 그의 조부인 이세좌, 부친인 이수원, 아들 이호약, 손자 이광악의 묘가 위아래 5대에 걸친 묘역 조성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여러 가지 석물들이 당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15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문인석 조각 수법의 변화상을 한 곳에서 엿보고 학습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괴산 이연경 묘역 배치도

 

 

괴산 이연경 묘역 표지판

 

 

광산이씨 묘역 표지석

 

이 곳에서 300m 가서 좌측으로 올라가시면 이연경 묘역이 보입니다.

 

100m 가서 돌계단으로 올라가시면 이연경 묘역이 보입니다.

 

 

이연경을 중심으로 이연경, 아들 이호약, 손자 이광악장군의 묘는 돌계단으로 올라가시고, 부친 이수원, 조부인 이세좌의 묘는 좌측으로 가시면 됩니다. 우선 우측 돌계단으로 먼저 갑니다.

 

 

이연경 묘역 전경

 

 

이연경의 손자인 충장공(忠壯公) 이광악(李光岳, 1557~1608)과 처 여흥민씨의 묘

 

충장공(忠壯公) 이광악(李光岳, 1557~1608)

 

* 조선시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아버지는 군수 이호약(李好約)이다.

 

1584(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 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 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김시민을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 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연경의 아들인 이호약(李好約) 의 묘

 

 

이연경 묘역 전경

 

 

정효공(貞孝公) 이연경(李延慶, 1488~1522)과 부인 전주이씨 합장묘

 

정효공(貞孝公) 이연경(李延慶, 1488~1522)

 

* 조선전기 선릉참봉, 공조좌랑,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도사 이수원(李守元)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房氏)로 사용(司勇) 방의문(房毅文)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다. 1518년 풀려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해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자손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 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했을 때 재상의 선출이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힘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했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 귀양 간 인물들을 적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워 귀양을 면했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충주 북촌 인근에 거주하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한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한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문하가 되었는데, 노수신(盧守愼)·강유선(康維善)·심건(沈鍵)은 이연경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광안군(廣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팔봉서원(八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정효공 이연경과 부인 전주이씨 합장묘

 

 

이연경 묘역 전경

 

 

이수원, 이세좌의 묘로 이동합니다.

정말 무더운 날씨입니다. 얼굴에서 땀이 비오 듯합니다. 

 

 

이연경의 부친인 이수원의 묘

 

 

이연경의 조부인 이세좌의 묘

 

2021.07.18.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글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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