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제7호 _ 금남 남산영당 (錦南 南山影堂)
수량/면적 : 1동/61.3㎡
지정일 : 2012.12.31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남산길 51-4
시 대 : 9년(1906년)
남이웅(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광무 10년(1906) 유림들이 세웠다.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치가였던 선생은 평소 법을 준수하고 사치를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광해군 5년(1613)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좌당 등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잡혀갈 때 극진히 모시고 따가갔다와 후에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 16년(1638) 대사헌이 된 후 법을 철저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사당 뒤쪽으로 선생의 묘소와 묘비가 있다
금남 남산영당 표지판
금남 남산영당 관리사
금남 남산영당 전경
금남 남산영당 전경
금남 남산영당 외삼문
금남 남산영당
남이웅(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남산영당(南山影堂) 현판
남산영당
문정(文貞)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이괄(李适)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 세자를 시종하고 청에 다녀왔다. 본관은 의령. 자는 적만, 호는 시북. 할아버지는 참판 응운이며, 아버지는 위(瑋)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수찬·응교를 지냈다. 인조반정 뒤 오위장·황해도관향사·안악군수를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주 수성대장으로 도원수 장만을 도와 공을 세우고 진무공신 3등에 춘성군으로 봉해졌다. 1632년에는 인목대비의 상사에 수릉관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으로 잡혀갈 때 우빈객으로 세자를 호위하고, 돌아와서는 부원군에 봉해졌다. 1646년 우의정이 되어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의 사사를 반대해 사직했다. 1648년 좌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남산영당
남산영당의 건물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남산영당 정면
2022.03.09. 금남 남산영당
글 문화재청,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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