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남도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_한용운선생생가지, 만해 문학 체험관, 심우장

기리여원 2022. 7. 22. 14:12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 _ 한용운선생 생가지 (韓龍雲先生 生家地)

 

면  적 : 484㎡
지정일 : 1989.12.29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성곡리)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만해(萬海)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이 신간회는 후에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고 추진되었다.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한용운선생 생가지 표지판

 

 

한용운선생 생가지 표지석

 

 

한용운선생 생가지 전경

 

 

만해 한용운선생 생가지 성역화기(卍海 韓龍雲先生 生家址 聖域化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 동상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한용운선생 생가지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한용운선생 생가지

 

 

한용운선생 생가지

 

 

한용운선생 생가지

 

 

전대법륜(轉大法輪) 현판, 복제품

 

轉大法輪(전대법륜)의 현판은 한용운선생이 말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며  뜻은  거대한 진리의 세계는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용운선생 생가지 정면

 

 

한용운선생 생가지 우물

 

 

한용운선생 생가지 

 

 

한용운선생  사당 전경

 

 

만해사(卍海祠) 외삼문

 

 

한용운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만해사(卍海祠)

 

 

 

만해사(卍海祠)

 

 

만해사(卍海祠)

 

 

만해사(卍海祠) 현판

 

 

만해 한용운 영정

 

 

만족시비 공원의 한용운 시 복종

 

한용운 선생의 시 '복종'을 포하하여 민족시인들의 시비를 산책로로 조성

 

만해 문학 체험관

 

2007년 개관하였으며,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를 비롯하여 그의 철학 세계를 엿볼 수 있는 60여점의 유품 전시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지상(萬海 韓龍雲之像)

 

 

만해 한용운 영정

 

 

<오도송(悟道頌)> _ 만해 한용운

 

1917년 12월 3일밤 10시경 좌선 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읊은 게송

 

<유심(惟心)> _ 만해 한용운

 

1918년 9월 1일 창간된 불교잡지로 정신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한 잡지

 

<님의 침묵(님의 沈默)> _ 만해 한용운, 회동서관 1926년(판본)

 

<님의 침묵( 沈默)> 한용운(韓龍雲), 1926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띠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뜨리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님의 沈默)> _ 만해 한용운, 한성도서 1950년(판본)

 

 

전대밥륜(轉大法倫) _  만해 한용운

 

진리의 변화를 설명한 글(서작)

법의 바퀴가 크게 굴러간다.

 

마저절위(磨杵絶韋) _ 만해 하용운

 

- 마저 :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등었다.

- 절위 :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져 버렸다.

 

<송수첩(頌壽帖)> _ 만해 한용운 즉흥 한시 외 12편

 

동대문 밖 청량사 회갑연에서 오세창, 권동진, 안종권, 박광, 장도환, 김관호등 만해의 송수만년을 기원하며 송수첩에 쓴 시

 

 

 

▼ 한용운 생가 심우장(2019.02.19)입니다.

 

사적 제550호 _ 만해 한용운 심우장 (萬海 韓龍雲 尋牛莊)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로2924, ,2 (성북동)

 

심우장은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1933년에 지은 집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중국에 망명하여 의병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의 훈련장을 돌면서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93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명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선생은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등이 있다.

 

심우장의 규모는 앞면 4·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 기와집으로, 선생은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심우(尋牛)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이라고 한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 우측면

 

 

만해 한용운 심우장 우측면

 

2022.07.05,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

글 문화재청, 전시자료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