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비지정문화재

63년간 운영된 약방, 괴산 청인약방

기리여원 2022. 7. 31. 13:32

괴산 청인약방(槐山 淸仁藥防)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도정리

 

청인약방은 현대적인 의료시설이 부족하던 때에 시골에서 약을 구입할 수 있고, 아플 때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1950년대에는 약업을 양약존상으로 불렀다고 한다. 약방 이름도 약점 → 약포 → 약방으로 바뀌었다. 이후 약사가 많이 배출되고 시골 지역에도 약국이 많이 생겨나면서 요즘에는 약방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청인약방은 1958년에 개업한 이후 현재까지 63년간 운영된 약방이다. 건물은 칠성면 두천리에 있던 성씨가의 별당을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당초 목조기와집이었으나 현재는 함석지붕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약방을 운영해온 신종철 약업사가 살아온 이야기가 2019~20년 사이 방송 · 잡지등에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에 약방 보존을 바라는 뜻에서 2020년 6월 15일 괴산군에 기부하였다.

 

청인약방은 오래된 건물 · 각종 장부와 책자 등 63년의 약방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함께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괴산 청인약방 표지판

 

 

괴산 청인약방 전경

 

 

괴산 청인약방(槐山 淸仁藥防)

 

어떻게 약방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는 졸업했으나, 가난으로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공부가 하고 싶어 서울 용산의 고향 어른께서 운영하시는 한 치과의원에서 기공실 일과 각종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마포의 숭문중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했죠. 그러던 중 6·25전쟁으로 인해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딱히 하는 일 없이 있던 중 치과에서 성실히 일했던 나를 주변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청주, 인천 등의 치과를 전전하며 기공사 일을 이어나가다가 동생이 군에 입대하면서 부모님을 모실 사람이 없어 다시 귀향했습니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이제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예전에 청주 치과서 일했던 당시 양약존상(양약 도매상) 충북도 회장으로 계신 분이 "너 약방 허가증 하나 해주랴?" 할 때 "나는 의가가 되지 약장사는 안 합니다"하고 거절했던 기억이 나 다시 회장을 찾아가니 "그 때 해놨어."하며 약과 허가증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져와 1958년부터 지금까지 63년째 약방을 하고 있지요.

 

괴산 청인약방

 

청인약방 이름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약방을 여는 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청주의 양약존상과 인천병원 원장 부부 그분들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청주의 '淸'자와 인천의 '仁'자를 따서 처음엔 청인약점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청인약포로 바꿨다가 지금의 '청인약방'이 된 것이죠

 

괴산 청인약방

 

약방을 운영하며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어떤 때인가요?

 

약방 개업 당시에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라 우리 면 인구도 만 명이나 됐습니다. 하지만 면에 의료시설이라고는 한약방하나, 양약방 3개가 있었는데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나밖에 없어서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우리 약방만 찾았죠. 가난한 이들이 많아 약 값을 반은 받고 반은 못 받으며 거의 무료투약을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어른들은 급성폐렴, 아이들은 홍역, 장티푸스등으로 많이 죽었는데 페니실린이나 마이신이 나오면서 이 약을 먹고 살아났죠. 당시 면에서 마땅한 의료시설도 없고, 임상경험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저밖에 없어서 급하게 째고 꿰매고 하는 일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불법 의료 행위지만 죽을 사람 많이 살렸죠. 지금 돌이켜봐도 가장 큰 보람입니다.

 

청인약방 내부

 

약방 내부에는 63년간 약방을 운영하면서 사용하던 물품과 각종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다.

 

청인약방 내부

 

 

괴산 청인약방 

 

약방을 운영하며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가난으로 인해 빚으로 사는 이가 많아 돈을 얻어 쓰려고 해도 은행이나 농협도 없는 때라 사채에 의존했던 때였습니다. 돈이 필요하니 얻어 달라고 해서 데리고 가 내가 보증을 서고 얻어준 돈이 60~70년대에 수백 명에 20여억 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2/3는 빌린 이가 갚고, 나머지 1/3인 수억 원은 가난으로 갚을 길이 없어 1, 2년 사이 연체로 금방 10억이 되고 몇 해 가서는 20억이 되었죠. 보증인이 나에게 압류 수속이 들어와서 청주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와 급한 이들 먼저 갚아 나갔는데, 40여 년에 걸쳐 다 갚아주고 지금까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거의 다 고인의 되었고, 더러는 생존해있으나 갚을 길이 없는 사람뿐이었죠. 이것이 가장 힘들었던 생활입니다.

 

괴산 청인약방 좌측면에 그려진 칠송암

 

칠송바위(七松巖) 

 

칠송암이라는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먼 옛날 하늘나라의 일곱 신선이 죄를 짓고 바위로 변해 땅에 떨어졌다.

시간이 흐른 후 하늘나라의 대왕은 이곳저곳의 땅에서 외롭게 지내는 그들을 측은히 여겨 모여 살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평소 보아둔 북두칠성 모양의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해 대왕은 기꺼이 이들 7개의 바위를 7그루의 소나무 옆으로 옮겨주었다. 이 일곱 바위와 일곱 소나무를 일러 칠송암(七松岩)이라고 했다 한다."

 

『구한말지형도 』 『조선지형도 』에도 칠성암(七星岩)이란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1960년대까지 도정리에는 실제로 두 그루의 소나무와 바위들이 남아 있어, 7월 칠석이면 동민들이 모여 국태민안과 마을의 복을 기원했고, 5월 단오에는 소나무에 그네를 매 타기도 했다고 한다.

 

괴산 청인약방 

 

어떻게 약방을 괴산군에 기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약국은 현재도 많이 있고 앞으로도 존재하겠지만 약방은 아무 기록 없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찾아본다면 아직 전국에 더러 약방이 있겠지만 이곳 청인약방처럼 옛 약방 모습과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약방이 소문이 나면서 갈수록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이참에 근현대 역사 문화 보존 등을 위한 약방 박물관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괴산군에 기증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거죠.

 

괴산 청인약방 후면

 

 이곳을 찾아오신 분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구십 평생 살아온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입니까"라고 다들 묻곤 합니다. 나는 4자로 "인과응보"라 말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거기엔 응분의 보답이 따릅니다. 그러니 삶이란 주어진 여건 속에서, 바르게 착하게 성실히 남을 돕고 열심히 살면 반드시 좋은 보답이 있고 나 아니면 자식, 손자에게까지 그 덕이 갈 것이란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현재 자식들과 손주들은 학비 등에 큰 도움을 주지도 않았으나 모두 저들의 노력만으로 국내외 명문대를 졸업하고 장성하여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람답게 사는 길은 '인과응보'란 생각을 가지며 삶을 살아나가시면 좋겠습니다.

 

* 시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옛 약방의 모습과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으므로 등록문화재로 적극 추천합니다.

 

2022.07.26. 괴산군 칠성면 도정리, 괴산 청인약방

전시안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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