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남도

독립운동가 이종일선생 생가지

기리여원 2022. 11. 22. 11:36

충청남도 기념물 제85호 _ 이종일선생 생가지 (李鍾一先生 生家址)

 

면   적 : 3,183㎡

지정일 : 1990.12.31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옥파로 199-7 (원북면, 옥파이종일 생가지)

시   대 : 조선시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였던 이종일(18581925)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박영효와 함께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광무2(1898) 한국 최초의 한글신문을 창간하고 1908년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일본의 침략정책을 공격하였다. 19253월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19623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다.

 

생가는 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 초가로 1986년 복원하였다. 남쪽으로부터 건넌방·대청·윗방·안방이 각 한 칸씩이고 부엌이 2칸이며 앞에 마루를 깔았다. 앞으로 달아낸 날개에는 북으로 문이 나 있으며 그 동쪽으로 2칸 방이 있다. 가옥의 주위는 낮은 돌담으로 둘렀다. 그 뒤쪽으로 1990년에 완공한 앞면 3·옆면 2칸의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종일선생 생가지 표지판

 

 

이종일선생 생가지 표지석

 

 

옥파(沃波) 이종일(李種一)선생상

 

이종일(李種一, 1858년 12월 10일(음력 11월 6일) ~ 1925년 8월 31일)은 조선 말의 문신, 개혁운동가이자 한국의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 국문학자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보성사에서 3만 5천 부의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다. 아호는 옥파(沃波), 천도교 도호는 묵암(默庵)이다. 천연자(天然子), 중고산인(中皐散人), 중헌(中軒)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1882년 일본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뒤, 개화 운동에 투신하여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했다. 또한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손병희의 권고로 천도교에 입도한 뒤에는 천도교 포교활동 외에 3.1 운동에도 가담하였다.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국문학자로 활동하였다. 천도교 교역자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종린은 그의 친척 동생이었다.

 

이종일 사당인 충애사(忠愛祠) 외삼문(外三門)

 

 

체험관

 

 

이종일 사당인 충애사(忠愛祠) 전경

 

 

이종일 사당  내삼문(내三門

 

 

이종일 사당인 충애사(忠愛祠)

 

충애사(忠愛祠)의 건물규모는 1990년에 완공한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맞댄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이종일 영정

 

 

▼이종일선생 생가지 입니다.

 

이종일선생 생가지

 

생가는 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 초가로 1986년 복원하였다. 

 

이종일선생 생가지

 

 

이종일선생 생가지

 

 

이종일선생 생가지

 

 

이종일선생 생가지 후면

 

 

이종일선생 생가지

 

남쪽으로부터 건넌방·대청·윗방·안방이 각 한 칸씩이고 부엌이 2칸이며 앞에 마루를 깔았다. 

앞으로 달아낸 날개에는 북으로 문이 나 있으며 그 동쪽으로 2칸 방이 있다

 

이종일선생 생가지

 

 

이종일선생 생가지

 

 

▼옥파 이종일기념관입니다.

 

옥파(沃波) 이종일(李種一) 기념관

 

 

옥파(沃波) 이종일(李種一) 흉상

 

 

옥파(沃波) 이종일(李種一)선생이 사용했던 압록강 벼루 및 간찰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태화관)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민족대표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의 인사말로 시작된 독립선언서 중 이종일 선생의 독립선언서 낭독장면

 

옥파비망록권일(沃波備忘錄券日)

 

2022.11.05. 태안군 원북면, 이종일 생가지

글 문화재청, 위키백과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