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재자료

정종의 9번째 아들 석보군 묘소,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84호_충주 석보군 묘소

기리여원 2023. 1. 20. 07:22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84호 _ 충주 석보군 묘소 (忠州 石保君 墓所)


수량/면적 : 1곽
지정일 : 2011.03.04
소 재 지 : 충청북도 충주시 다래월2길 20 (소태면)


石保君(李福生) 墓는 1447(세종 29)년 경기도 양주군 미아리에 조성하였으나 시가지 확장으로 인하여 1958년 2월25일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 산46번지로 이장하였다.

1872년에 제작된 長明燈과 墓表를 함께 이전하였다.

묘역 입구에 神道碑가 있으며 石碑(2점), 望柱石, 魂遊石, 床石, 香爐石, 長明燈(2점), 童子石, 文人石, 羊石 등을 갖추고 있다.

墓表 음기에 “崇禎後五壬申 九月 日改立”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 비의 건립이 1872년 9월임을 알 수 있다.

신도비는 1990년 건립하였으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墓碑 1점은 1964년(가첨석을 갖춤)에 건립한 것이다. 장명등 1점을 제외한 기타 석물은 1990년경 묘소정화사업을 시행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봉분은 높이 약 160㎝에 직경 450㎝이며 護石(95㎝×79㎝) 12매를 둘렀는데 그 안에 12지상을 양각하였다. 부인(鶴城君 夫人) 原州 金氏와 합장하였다.

석보군(石保君) 이복생(李福生 ; 1399~1447)은 조선시대 정종의 9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해평윤씨(淑儀 海平尹氏)이다. 호는 검묵당(儉默堂), 시호는 정혜(靖惠)다. 명선대부에 이르고 석보군 겸 영종정경부사로 추봉됐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으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이라 일컬었다.

석보군은 형 수도군과 함께 따라가 부왕을 정성껏 봉양했다. 그는 검묵(儉默)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검묵공자'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그의 당호도 검묵(儉默)이다.

개발사업으로 인하여 경기도 양주군에서 현 위치로 이장한 까닭에 속물은 쉽게 옮길 수 있는 비석과 장명등만을 이장하였으나 왕자의 무덤으로 갖추어야 할 석물은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역사적으로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 왕실의 매장풍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충주 석보군 묘소 표지판

 

 

위 주소를 치고 오면 이 곳이 나옵니다. 여기서 화살표 따라 150m 우측으로  올라갑니다.

 

 

우측으로 갑니다.

 

 

이 묘소를 끼고 우측 화살표 방향으로 갑니다.

 

 

이 곳에서 우측으로 직진해서 가면 석보군 묘소가 보입니다.

 

 

충주 석보군 묘소 전경

 

 

 1990년 건립하였으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 石保君神道碑(석보군신도비)

 

 

묘 좌측에 세운 헌성비(獻誠碑)

 

 

충주 석보군 묘소

 

석보군 이복생(石保君 李福生, 생몰년 미상)은 조선의 왕족으로, 조선 제 2대 정종의 아홉번째 서자이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충주 석보군 묘소

 

조선 제 2대 정종의 서자이자, 9남으로 생모는 숙의 윤씨(淑儀尹氏)인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정부인으로는 학성군부인 원주 김씨(鶴城郡夫人 原州金氏)이 있다. 자녀로는 정부인 김씨가 낳은 장남 연산부정(燕山副正)와 차남 인양부정 정(仁陽副正 整), 3남 곡성군 금손(鵠城君 金孫) 장녀 이씨와 차녀 이씨, 3녀 이씨, 4녀 이씨, 5녀 이씨가 있다. 본성이 청렴검소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가라 일컬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늘 산간에 은거하고 세상 일에 관여치 않았다.

 

1427(세종 9) 이복생은 약계춘, 보금 등과 간통하였으며, 태종의 국기(國忌)때에 광대들을 모아놓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마신 일과 효령대군과 관계한 약계춘, 의성군과 관계한 보금등과 간통하였고 음란한 짓을 일삼아 세종이 매우 미워하였고 원주로 유배되었다.

 

1436(세종 18) 왕에게 거짓보고 하여 해주의 온정에 목욕한다고 아뢰고는 아버지인 정종의 기신(忌辰)에 기생이 있는 춘천에 가서 순평군(順平君)이라 사칭하고, 여러 날 동안 유숙하면서 매를 놓아 사냥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왕명에 의해 직첩을 회수당하고 외방에 귀양보내졌다. 사헌부에서 다시한번 왕을 능멸한 죄를 물어 대죄로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세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2(고종 9) 석보정에서 석보군으로 추증되었다.

 

석보군 묘소의 석조물은 혼유석, 상석, 향로석, 구묘비, 신묘비, 동자상 한쌍, 석양 한쌍, 문인석과 망주석 한쌍, 장명등(위, 아래)이 세워져 있다. 

 

석보군 묘소의 혼유석, 상석, 향로석

 

 

구묘비와 신묘비

 

좌측 구묘비는 石保君兼領宗正卿府事 贈諡靖惠公諱福生之墓 郡夫人鶴城金氏祔 (석보군겸영종정경부사 증시정혜공휘복생지묘 군부인학성김씨부), 

우측 신묘비 는 明善大夫石保君兼領宗定卿府事靖蕙公之墓 配鶴城郡夫人原州金氏 祔右 (명선대부석보군겸영종정경부사 정혜공지묘 배학성군부인원주김씨 부우)라고 쓰여 있다.

 

좌측 구묘비는 후면에는 “崇禎後五壬申 九月 日改立”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 비의 건립이 1872년 9월임을 알 수 있으며 우측 신묘비 1점은 1964년(가첨석을 갖춤)에 건립하였다

 

동자상 한쌍

 

 

석양 한쌍

 

 

문인석 한쌍

 

 

십이지신상이 양각된 석보군 묘 봉분

 

봉분은 높이 약 160㎝에 직경 450㎝이며 護石(95㎝×79㎝) 12매를 둘렀는데 그 안에 12지상을 양각하였다.

 

십이지신상중 호랑이와 토끼상

 

 

석보군 묘소 후경

 

 

▼괴산 청안면에 위치한 석보군 묘각입니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 _ 괴산 석보군 묘각 (槐山 石保君 廟閣)


수    량 : 1동
지정일 : 1996.01.05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산 107-1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정종의 아홉번째 아들인 석보군 이복생과 부인인 원주 김씨, 장남인 양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05년에 초가로 지었으나 1930년 기와지붕으로 다시 지었고 1986년에 고쳐 지었다.

묘각은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괴산 석보군 묘각

 

2023.01.08. 석모군 묘소, 석보군 묘각

글 문화재청.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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