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원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_봉암서원

기리여원 2018. 4. 9. 06:59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 _ 봉암서원 (鳳岩書院)

 

수   량 : 일원

지정일 :  1981.10.20

소재지 : 전남 장성군 장성읍 화차길 159 (장안리)

 

망암 변이중(1546∼1611)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변이중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로 군사 전략에 밝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 등의 논문을 써서 화차를 제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숙종 23년(1697)에 세운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된 후 1976년과 1984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변경윤·윤진·변휴·변윤중을 추가로 모셔 현재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문 격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쪽에 교육 공간을 조성하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교육 공간으로는 유림의 회합 장소이면서 교육 장소로 사용하던 성경당과 유생들이 숙식하던 곳인 훈덕재, 경의재가 있다. 제사 공간으로는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신 종앙사를 아담한 규모로 마련해 놓았다. 화차를 제조하던 유적지로서 198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하였으며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글 문화재청

 

망암 변이중선생

 

망암선생(1546~1611)은 1546년 5월17일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서 태어나셨다. 선생의 휘는 이중(以中)이요 자는 언시(彦時)이며 본관은 황주(黃州)다. 망원선생의 5대조이신 사정(司正)공의 휘는 정(靜)으로 고려말 정치가 혼란하여 화를 피하고자 장성으로 오시니 장성의 변씨는 사정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사정공은 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의 따님과 결혼하여 교수(敎授)공 효우(孝友)를 낳으시고, 효우께서는 성균관 유생 호(浩)를 낳으시고, 효우께서는 성균관 유생 호(浩)를 낳으시고, 호께서는 처정(處禎)을 낳으시고, 처정께서는 택(澤)을 낳으시니 함풍이씨 이조참판 긍(兢)의 현손녀와 혼인하여 망암선생을 낳으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3세에 사마(司馬)시에 합격하고, 28세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 그 뒤로 호조, 예조좌랑, 황해도 도사, 형조정랑, 풍기, 함안군수, 종부시정 등을 역임했다.

 

선생의 나이 39세 되던 1636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이듬해인 1637년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시니 선생의 건강이 크게 나빠져 작은 암자를 부모님 묘소의 남쪽 봉우리 언덕 곁에 짓고,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서대(西臺)에 올라 묘소를 바라보며 절하고 통곡하였다. 그래서 이 암자를 '望菴'이라고 불렀는데 선생의 호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예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선조가 의주로 파천(播遷)할 때 임금을 수행하였고, 3차에 토벌대책에 상소하고, 전라도 소모사(召募使,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거두어 수송하는 일을 담당), 조도어사, 경기독운사 등을 역임하며 의병을 일으키고, 수만의 정병을 모집하였으며 3만 여석의 군량을 조달하였다. 때로는 도성 탈환을 위해 병사를 지휘하며 왜적과 싸워 수차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더욱이 그가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해 자비로 만든 화차3백랑은 임진왜란을 평정한 계기를 마련했던 행주대첩의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우리나라 무기발달과 과학사에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다.

 

공은 전란 후 호성원종1등공신, 선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서는 장성향헌 20조를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신을 수습하고, 향속과 풍습을 순화하는데 힘썼다.  공이 돌라가시자 조정에서는 도승지를 증직하고, 이조참판과 양반제학을 가증했다. 수은 강항(姜沆)이 지은 묘지명과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묘갈명에 선생의 학문과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697년 봉암서원을 건립하여 주향하고, 행주서원과 호국사에도 배향되셨다.

 

삼강정려(三綱旌閭)

 

삼강정려(三綱旌閭)

 

삼강이란 유교의 도덕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세 가지 도리 즉,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며, 삼강 정려란 위와 같은 도리를 장 지킨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그 뜻을 기리는 곳을 말한다. 봉암서원 입구 왼쪽에 있는 삼강정려는 망암 변이중 선생의 종제인 휴암 변윤중 선생과 부인 함풍성(咸豊成)씨 그리고 며느리 이천서(利川徐)씨의 삼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변윤중은 호가 휴암인데 임진왜란 때 화차를 만들어 왜적을 물리친 망암 변이중 선생의 사촌 동생으로 학문이 뛰어나 선조 때는 상의원 직장이란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이 의주까지 피난 길에 오를 때 종형 변이중과 함께 임금을 모시기도 하였다.

 

또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평소 거느린 종들과 장정 200여명을 모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장안리에서 왜적들과 싸웠으나, 적의 수효가 워낙 많아 10여일 동안 수십 명을 사살하면서도 결국 패전하고 말았다. 장정들을 다 잃은 변윤중은 마지막 싸움터였던 부엉 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변윤중의 부인 성(成)씨도 남편의 뒤를 따라 남편이 몸을 던진 바로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역시 순하였다.

 

변윤중의 아들 형윤(亨胤)과 며느리 서(徐)씨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부엉바위로 가서 보니 부모님의 시신이 나란히 떠 있었다. 이를 보고 형윤이 죽으려 하자 서씨 부인이 남편의 소매자락을 붙잡고 눈물을 흐리면서, "당신이 이 집안의 외아들이므로 만일 죽는다면 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당신대신 목숨을 바치겠소. "하더니 이윽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하늘도 이들의 충 ·효 · 열에 감동하여 청천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고 무지개가 서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고, 그 뒤 시신을 건져냈는데, 서씨부인은 하류에서 몸을 던졌으나, 그 시신이 거슬러 올라가서 시어머니의 손을 꼭 움켜잡고 있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변윤중이 부엉바위에서 돌아가셨다 하여 그의 호를 휴암(鵂巖=부엉바위)이라 하고, 1893년에 장안리 320번지에 정면 3칸, 측면1칸으로 된 단층 맞배지붕으로 여각을 짓고 여각 내에 충신,열녀, 효부의 현판을 판서 조종필의 기문으로 걸고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현재의 비각은 지난 1988년 후손 변동권, 변공섭 등이 비각이 비바람으로 많이 훼손되어 봉암서원 입구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삼강정려(三綱旌閭) 현판

 

삼강정려에는 휴암공과 부인 함풍성씨 며느리 장성서씨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며느리 장성서씨지려비

 

 

 

휴암공 변윤중선생 부인 함풍성지려비

 

 

 

휴암공 변윤중지려비

 

 

 

 

 

 

 

 

 

 

 

 

 

 

 

 

 

 

 

 

 

 

 

외삼문인 두남문(斗南門)

 

외삼문이라고도 하는 두남문은 서원 입구에 위치해 있다. 호곡의 샹량문에 '先生道東千載斗南一人, 선생은 도동에서 천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분이요, 북두성 남쪽의 오직 한 분이시다"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청하(淸河) 이병현이 편액의 글씨를 썼다

 

 

외삼문인 두남문(斗南門) 현판                                             

 

 

 

 

외삼문인 두남문(斗南門)

 

 

 

봉암서원복원비(鳳巖書院復元碑)

 

 

 

 

 

 

 

 

 

 

성경당

 

앞쪽에 위치하며 유림의 회합 장소이면서 교육장소로 사용하던곳이다

 

봉암서원(鳳巖書院) 편액

 

편액은 송성룡이 쓴 글씨임.

 

성경당(誠敬黨)

 

성경당은 유생들이 글을 배우는 강당이다. 망암선생이 지으신(心得) 가운데 '誠敬'을 학문의 종지(宗旨)로 하셨기 때문에 성경당이라 불렀다. 가운데 대청마루와 같은 넓은 공간이 있고, 양쪽은 방으로 이루어졌다. 지방의 교육기관은 향교(鄕校)와 서원 그리고 서당이 있었는데 서원은 사립학교와 같은 곳으로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유생들은 대부분 서당에서 천자문이나 소학, 동몽선습 등을 배운 뒤 사서삼경, 통사(通史) 등을 배웠다. 서원에는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등이 있었으며 엄격한 규율과 법도에 따라 생활했다

 

성경당(誠敬黨) 편액

 

편액은 일중 김충현의 글씨임 

 

성경당(誠敬黨)

 

 

성경당(誠敬黨)

 

 

성경당(誠敬黨) 측면

 

 

훈덕재(薰德齋)

 

훈덕재는 동재(東齋)로 호곡의 상량문 가운데 '大賢爲一代之師也, 薰德莫近於鄕里, 크게 어지시어 한 시대의 스승이 되시니 훈덕이 가까운 향리에만 미친 것이 아니다."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경의재와 함께 서원 유생들의 생활공간으로 학문의 성숙, 서원에 들어온 순서에 따라 방이 결정되기도 했다. 훈덕재의 편액은 성균관장 이재서가 썼고, 전물의 크기는 11.5평이다.

 

 

                                                                                훈덕재(薰德齋) 편액

 

훈덕재의 편액은 이재서가 쓴 글씨임.

 

 

 

 

 

 

                                                                                                      

봉암서원묘정비

 

묘정비는 서원의 내삼문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다. 1991년에 세운 묘정비는 봉암서원이 건립되고 복원된 과정을 설명하고 망암 변이중 선생과 배향된 여섯 분의 선생들을 소개하고 있다. 1697년에 세운 봉암서원이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그 뒤로는 일제 강점기와 6.25 사변 등으로 서원을 다시 건립하지 못하다가 1981년 서원을 복원하고 묘정비를 세웠다

 

 

 

                                                                                                      

경의재(景義齋)

 

경의재는 서재(西齋)로 선생의 충의를 경모하는 뜻이다.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보통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 곳 서원에서는 경의재와 훈덕재라 부른다. 경의재의 편액은 성균관장 이재서가 썼고, 전물의 크기는 11.5평이다

 

 

 

                                                                                                          

경의재(景義齋) 편액

 

 

 

 

 

 

 

                                                                         내삼삼문인 엄온문(嚴溫門)

 

엄온문은 신문(神門)  또는 내삼문이라고도 한다. 추담(秋潭) 김우급의 망암선생에 대한 만시(輓詩)에 '望之則嚴卽之溫, 바라보면 엄하시나 가까이 대하면 따뜻하셨도다"라고 한 뜻에서 취한 것이다. 종앙사로 들어가는 문으로 들어갈 때는 오른 쪽 문을 나올 때는 반대 편 문을 사용하고 가운데 문은 신문이라 하여 이용하지 않는다. 엄온문은 석계(石溪) 유태석이 편액의 글씨를 썼다.

 

 

                                                                         내삼삼문인 엄온문(嚴溫門) 편액

 

 

엄온문(嚴溫門) 편액은 석계(石溪) 유태석의 글씨임

 

 

                                                                                                       종앙사(宗仰祠)

 

종앙사는 서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망암 변이중선생과 윤진, 휴암 변윤중, 자하 변경윤, 명산 변덕윤, 청류당 변휴, 묵포 변치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종앙사라고 부른 것은 호곡(壺谷) 홍수주의 상량문에 '大賢爲一代之師也, 크게 어지시어 한 시대에 스승이 되시니"라는 구절의 뜻을 취한 것이다.

종앙사는 서원 안에 있는 엄온문을 지나 들어갈 수 있으며 담으로 쌓여 있는데 이는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남(城南) 홍석희가 상량문을 짓고, 여초(如初) 김응현이 편액의 글씨를 썼다.

 

 

 

                                                                                                         종앙사(宗仰祠)

 

 

 

                                                                                                          종앙사(宗仰祠)

 

 

 

 

 

 

 

 

 

 

 

 

 

 

 

 

 ▼여기서부터는 시징당입니다.

 

 

                                                                                   시징당(是懲堂)

 

망암선생의 화차도설을 참고하여 제작한 화차모형 · 총통 · 신기전 등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18점의 무기모형이 있다. 시징당이라고 한것은 '오랑캐를 응징한다'는 뜻으로 시경에서 취한것이다.

 

 

 

                                                                                   시징당(是懲堂) 표지판

 

 

 

                                                                                                        시징당(是懲堂)

 

 

 

                                                                                                        시징당(是懲堂) 현판

 

 

 

 

 

 

 

 

 

 

 

 

 

 

 

 

 

 

 

 

 

 

 

 

 

 

 

 

 

 

 

 

 

 

 

 

 

 

 

 

 

 

 

 

 

 

 

 

 

 

 

 

 

 

 

 

 

 

 

 

 

 

 

 

 

 

 

 

 

 

 

 

 

 

 

 

 

 

 

2018.04.01, 봉암서원

봉암서원자료,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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