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한국의 서원 9곳

기리여원 2019. 5. 15. 09:08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한국의 서원 9

 

 

  지역 명칭               주요 배양 인물

 

1. 사적 제 55_ 영주 소수서원 안향(1243~1306)

2. 사적 제154_ 경주 옥산서원 이언적(1491~1553)

3. 사적 제166_ 정읍 무성서원 최치원(857~ ?)

4. 사적 제170_ 안동 도산서원 이황(1501~1570)

5. 사적 제242_ 장성 필암서원 김인후(1510~1560)

6. 사적 제260_ 안동 병산서원 류성룡(1542~1607)

7. 사적 제383_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1548~1631)

8. 사적 제488_ 달성 도동서원 김굉필(1454~1504)

9. 사적 제499_ 함양 남계서원 정여창(1450~1504)

 

                   사적 지정된 으로~

 

 

 

사적 제55호 영주 소수서원입니다.

 

사적 제55_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면   적 : 89,975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번지 내죽리 151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보물 제1403_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榮州 紹修書院 講學堂)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 높이 8.5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기단3(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보물 제1403_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榮州 紹修書院 講學堂)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榮州 紹修書院 講學堂) 내부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유림들의 기숙사이다. 지금도 춘·추향래와 유림행사시에 유림들이 연중 사용하고 있다.

 

직방(直方)의 뜻은 경건함으로 내면의 마음을 곧게 유지하고 의리로 외면의 행상을 방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소수성원의 잡록의 기록을 보면 "직방재 편액을 판목에 새겼다. 직방재(直方齋) 세글자는 옛날에 퇴계 이황이 직접 쓰신 글씨가 벽에 붙여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면서 먹색이 마멸되어 누차 종이를 바꾸어 모사하여 전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일신재(日新齋)

 

일신재는 애당초 독립건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직방재를 확장하여 하나의 방을 증축하였고 새로 지어진 장이어서 '신방(新房)'이라 불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별도의 현판도 있지 않았다. 1804년에 성언근()이 원장이 되어 중수한 뒤 신방(新房)에 일()을 보태고 방()을 재()로 고쳐 일신재(日新齋)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다.

 

* 일신재 는 서원 원장 성언근이 1799(정조23)에 직방재옆 신방(新房)을 늘려 지은 건물임



 

 

 

 

사적 제154호 경주 옥산서원입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을 모셔놓은

 

                                                                                      옥산서원

 

 

 

수양철학의 대가, 참된 사람되라 일깨우는듯

 

사적 제154_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면   적 : 26,063

지정일 : 1967.03.08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무변루(無邉樓)

 

 

사적 제154_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을 제향하고 후진(後進)을 교육하기 위해 조선 선조(宣祖) 5(1572)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임금이 서원이름을 내렸다.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기숙사인 동재(東齋, 민구재, 敏求齋)와 서재(西齋, 암수재, 闇修齋),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 어서각(御書閣), 장서각인 청분각(淸芬閣)과 회재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건물 곳곳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석봉(石峯)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의 명필이 쓴 현판들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각 건물들의 건축적의미는 크지 않지만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에서복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書齋)였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선조(宣祖) 5(1572)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임금이 서원이름을 내렸다.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기숙사인 동재(東齋, 민구재, 敏求齋)와 서재(西齋, 암수재, 闇修齋),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 어서각(御書閣), 장서각인 청분각(淸芬閣)과 회재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건물 곳곳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석봉(石峯)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의 명필이 쓴 현판들이 있다.

 

석봉 한호가 쓴 구인당 편액

 

'구인'이란 회재 선생이 추구했던 세계의 요체이다

 

문원공회재이언적신도비 (文元公晦齋李彦迪神道碑)

 

 

회재 (晦齋, 李彦笛, 1491~1553)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

 

구인당 뒤에는 체인묘(體仁門)이 있고, 체인문 안에는 체인묘(體仁廟)란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과 전시청이 있다. '체인'이란 인을 몸으로 체득하여 인의 마음이 몸 밖으로 배어나오는 상태를 말한다

 

 

 

사적 제166호 정읍 무성서원입니다.

 

사적 제166_ 정읍 무성서원 (井邑 武城書院)

 

면 적 : 8,015

지정일 : 1968.12.19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번지 무성리 500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신라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때 관리였던 신잠(申潛)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교육기능과 제사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1696)에 임금으로 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당, 현가루, ·서재, 비각, 명륜당 등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옆면 3칸의 규모로 성종 15(1484)에 세웠고, 문루인 현가루는 앞면 3·옆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2·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이곳에는 성종 17(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자료가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 현가루(鉉歌樓)

 

무성서원에는 외삼문 대신 1891년 건립된 전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가 들어서 있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炫歌不輟)에서 따온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 한다는 의미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 강당(講堂)

 

현가루 문을 들어서면 1828(순조28) 중건된 정면5칸 측면2칸의 공학공간으로 사용되는 강당이 들어서 있는데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고 중앙 3칸의 마루는 앞뒤가 트여져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강당 전면에 걸려있는 현판을 보면 1696(丙子22) 사액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성서원(武城書院) 강당(講堂)

 

 

태산사(泰山祠)

 

1484(성종15) 창건하고 1844(헌종10) 중수하였다.

 

정면 3, 측면 3칸의 규모로 고운 최치원을 중심으로 불우헌 정극인 등 7위를 모시고 있다

 

 

 

사적 제170호 안동 도산서원입니다.

 

사적 제170_ 안동 도산서원 (安東 陶山書院 )

 

면   적 : 323,110

지정일 : 1969.05.28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시  대 : 조선시대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安東 陶山書院 )

 

 

보물 제201_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安東 陶山書院 典敎堂)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安東 陶山書院 典敎堂)

 

 

보물 제211_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安東 陶山書院 尙德祠 三門)

 

 

보물 제211_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安東 陶山書院 尙德祠 三門)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이황 선생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쓴 분이다.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7(1574)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앞면 3·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은 상덕사를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앞면 기둥은 계단 높낮이때문에 다른 기둥보다 길이가 길다. 정문 양옆으로 사당 주위를 둘렀던 토담은 1969년 보수공사 때 돌담장으로 모두 바꾸었다.

 

간결하고 매우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사적 제242호 장성 필암서원입니다.

 

사적 제242_ 장성 필암서원 (長城 筆巖書院)

 

면   적 : 52,666.8

지정일 : 1975.04.23

소재지 :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379번지 필암리 378-379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필암서원 (筆巖書院) 확연루 (廓然褸)

 

필암서원의 출입문으로 선비들이 시를 짓고 휴식을 취했던 건물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21842.9

 

필암서원(筆巖書院) 청절당(淸節堂)

 

 

필암서원(筆巖書院) 청절당( 淸節堂)

 

선비들이 모여서 강의를 받고 학문을 토론하던 건물이며, 선비들의 모임과 제사때에는 유림들의 회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이다. (1585.9)

 

필암서원(筆巖書院) 경장각(敬藏閣)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墨竹圖)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편액은 정조의 글씨이며 망이 처져있다. (313)

 

우동사(祐東祠)

 

필암서원의 사우로 북쪽에 하서 김인후선생, 동쪽에 고암 양자징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4칸반 29)

 

 

 

사적 제260호 안동 병산서원입니다.

 

사적 제260_ 안동 병산서원 (安東 屛山書院)

 

면 적 : 22,620

지정일 : 1978.03.31

소재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대루(晩對樓)

 

 

안동 병산서원 (安東 屛山書院) 강당인 입교당(入敎堂)

 

 

입교당(入敎堂)에서 바라 본 만대루(晩對樓)

 

 

병산서원(屛山書院) 내삼문(內三門)

 

 

병산서원(屛山書院) 존덕사(尊德祀)

 

 

 

사적 제383호 논산 돈암서원입니다

 

사적 제383_ 논산 돈암서원 (論山 遁岩書院)

 

면 적 : 5,548

지정일 : 1993.10.18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외 5필지

시 대 : 조선시대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시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돈암서원(遁岩書院) 산앙루(山仰樓)

 

 

정의재, 양성당, 거경재

 

 

돈암서원(遁岩書院) 양성당(養性堂)

 

양성당은 유생들리 모여 강학하던 서재이다.

사당 바로 앞에 위치하여 정면 5,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전후에 퇴를 둔 대청이며, 좌우에는 온돌방 각1칸씩을 두었다. 서원 이건(고종 18, 1881) 당시 대강당인 응도당을 옮겨오지 목하고 대신 양성당을 옮겨서 강당으로 활용하였다

 

보물 제1569_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論山 遯岩書院 凝道堂)

 

선현께 제사지내고 학문을 이어받고자 설립한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으로 인조 12(1634)에 세웠다. 김장생(15481631)을 중심으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없어지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응도당은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서원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다. 건물을 옮길 때 기와에 적힌 기록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건물임을 알게되었다.

 

규모는 앞면 5·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옛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건물로 강당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_ 돈암서원 숭례사 (遯岩書院 崇禮祠)

 

숭례사 (崇禮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인 사당은 정면 3, 측면 3칸으로 앞쪽 열은 퇴칸이다. 실내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퇴는 벽돌바닥이다. 주간의 앞면에만 사분합 띠살문을 달고, 옆면은 회벽을 쳤다. 공포는 이익공 외출목 집과 동일한 수법으로 짜 올렸다. 내부의 양봉은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당 내부에는 주향(主享)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 네 분은 모두 문묘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서원이기도 하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사적 제488호 대구 달성 도동서원입니다.

 

사적 제488_ 달성 도동서원 (達城 道東書院)

 

면   적 : 26,766

지정일 : 2007.10.05

소재지 :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도동리 35번지

시   대 : 조선시대

 

도동서원은 1605(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이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서원은 선조1(1568) 에 쌍계서원이란 이름으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렸다. 그 뒤 선조 37(1604)에 보로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지금 이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으며, 광해군 2(1610)'도동'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 아래 외삼문과 환주문을 지나면 강당인 중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중정당 오른쪽 건물은 서원 관리인 살았던 전사청이고, 왼쪽 뒤편의 건물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이다. 중정당 뒤편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이 있으며, 내삼문 오른쪽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증반소가 있다.

 

도동서원은 수월루에서 높은 곳을 따라 환주문·중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어 앞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 영역,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이다. 또한 흙과 기와로 쌓아 만든 담장을 둘러서 검소하고 단아하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수월루(水月樓)

 

 

강당에서 바라 본 환주문과 수월

 

 

보물 제350_ 달성 도동서원 중정당사당담장 (達城 道東書院 中正堂祠堂담장)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동서원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1607)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이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도동서원 내부

 

 

도동서원(道東書院) 사당(祠堂)

 

 

사적 제499호 함양 남계서원입니다.

 

사적 제499_ 함양 남계서원 (咸陽 灆溪書院)

 

면 적 : 41,218

지정일 : 2009.05.26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일원 (원평리)

시 대 : 조선시대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1552)에 지었다.

 

명종 21(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1868)에 이는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 전학후문에 배치를 하였다.

 

누문인 봉수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 옆으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남계서원 (灆溪書院) 풍영루(風詠樓)

 

풍영루는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 누각으로, 창건 당시 '준도문遵道門'이라고 하는 출입 삼문이었으나 후에 다락집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어의 내용 중"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는 증점曾鮎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하여 풍영루라 이름 지었다. "기수"'무우"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다.

 

출입은 사당의 내삼문과 함께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가는 형태로 기문은 정여창선생의 후손인 조선 말기 문장가 오담五潭 정환필鄭煥弼이 지었다

 

남계서원(灆溪書院) 강당(講堂)인 명성당(明誠堂)

 

강당은 경과 논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明誠堂)이라고 하며, 중용의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찹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라는 뜻이다. 강학영역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롤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각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방은 '거경居敬'이라 하며 '에서 이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고, 동쪽 방은 '집의集義'라고 하며 '호연지기는 도와 짝이 되는 의를 축적해야 생기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남계서원(灆溪書院) 강당(講堂)인 명성당(明誠堂) 내부

 

 

남계서원(灆溪書院) 사당(祠堂)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은 정면3,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주벽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선생을 모셨고, 서쪽은 1675년에 동계 정온선생을. 동쪽 1689년에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선생을 모셨다. 강익선생은 정온선생의 외삼촌이다

 

 

 

글 문화재청, 각 서원 전시자료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1. 1995. 12: 석굴암 · 불국사

 2. 1995. 12: 해인사 장경판전

 3. 1995. 12: 종묘

 4. 1997. 12: 창덕궁

 5. 1997. 12: 수원 화성

 6. 2000. 12: 경주역사유적지구(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능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

 7. 2000. 12: 고창 · 화순 · 강화고인돌 유적

 8. 2007. 06. 27 :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9. 2009. 06. 27 : 조선왕릉

10. 2010. 08. 01 : 하회와 양동마을

11. 2014. 06. 22 : 남한산성

12. 2015. 07. 04 :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 ;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익산 :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13. 2018 06. 30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14. 2019. 07 .06 : 한국의 서원 9: 소수, 옥산, 무성, 도산, 필암, 병산, 돈암, 도동, 남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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