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조선왕릉

사적 제196호_영월 장릉 (2016.05.05) , 박충원 낙촌비각

기리여원 2016. 5. 19. 19:03


사적 제196호 _ 영월 장릉 (寧越 莊陵)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출처 문화재청



장릉 (영월)_ 세계유산 조선왕릉 등재(2009년 6월30일)

조선 제6대 단종의 능


   단종(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은 제5대 문종의 아들로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하루 만에 승하하였고, 단종의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1453)으로 권력을 잡자 1455년(단종3) 세조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1457년(세조3)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명승 제50호)로 유배 되었으며, 그 해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기자 영월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 해 10월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1516년(중종 11) 장릉은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1698년(숙종 24)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 장릉 연혁

 - 1516년(중종 1) 암장지를 찾아 봉분 갖춤

 - 1580년(선조 13) 상석과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워 능역 조성

 - 1698년(숙종 24) 단종으로 복위하고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


* 장릉 제향일

  - 매년 4월 마지막주 금,토,일요일 : 영월군 단종제위원회

    제향일 :토요일 10:00~

 - 매년 10월 3일(양력) :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장.사릉봉향회 주관

 - 매년 10월 24일(음력) :  단종대왕이 사약받고 돌아가신 날(기신제) 단종제보존회





















엄홍도 정려각


엄흥도(興道)


   중국 한나라의 대학자였던 엄자릉(嚴子陵)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영월 엄씨 시조 엄임의(嚴林義)의 12대 손(孫)이다. 영월에 유배온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1457년 10월 24일 유시에 유배지인 영월 관풍헌에서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아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는 아들과 함께 몰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수습하여 묻고 행적을 감췄다. 그 후 242년 후인 숙종 25년(1699) 단종이 복위되어 노산군묘가 장릉으로 추봉되기까지 삼족형을 피하여 후손들은 각지로 흩어져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에 대한 관련 자료는 거의 접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엄홍도 정려각






장판옥
















참도가 'ㄱ'자로 꺽여 있어 독특하다


영월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여느 조선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반해 장릉은 'ㄱ'자형으로 꺾여 있다.


참도(參道)란 - 왼쪽은 신의 길인 신도

                 -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


 배식단












수복실






단종비각









장릉 정자각





















 영천






영천


















사적 제196호 _ 영월 장릉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의 외아들로 세종23년(1441년)에 태어나 12세인 1452년 조선 제6대 임금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즉위 3년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 후 1457년 세조에 의해 영월 청렴포로 유배되었고 그해 10월24일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 하셨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있어 경이로움을 더한다












망주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


봉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인 망주석에 조각하는 세호는 처음엔 별다른 형태를 갖지 못하다가 점차 동물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특별히 정립된 이론이 없다. 영월 장릉의 망주석은 조선 왕릉 중 세호가 없는 유일한 것이다





                                                                                        재실









재실 안에는 두 그루의 향나무 고목이 있다.


재실은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평상시에는 능참봉과 수호군이 사용하는 시설이다. 장릉 재실 안에는 두 그루의 향나무 고목이 남아 있어 장릉에 얽힌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단종역사박물관













조선 비운의 왕 단종이 묻힌 장릉의 '박충헌 낙촌비각'. 영월부사이던 낙천 박충원이 꿈속에서 단종의 무덤을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출처 : 문화재청, 카다록에서~~~




여기서부터는 사적 제209호_남양주 사릉입니다.


















사적 제209호 _ 남양주 사릉 (南楊州 思陵)           


사릉 (思陵, 사적 제209호)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는 판돈녕부사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454년(단종2)왕비로 책봉되었다. 1457(세조3)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도 궁궐에서 쫓겨나 부인으로 강봉되었고 그 후 단종을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단종이 17세 나이로 죽임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정업원(지금의 청룡사)뒤 산봉우리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였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으며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1698년(숙종24)노산군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이 복위되자 정순왕후도 부인에서 왕후로 복위되었다.


* 사릉 연혁

- 1521년(중종 16) 정순왕후 안장, 대군부인묘로 조성

- 1698년9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 복위, 사릉으로 높임


* 사릉 제향일

- 매년 5월20일 (양력)





실록으로 엿보는 왕 과 비


백성들이 따르고 애도한 왕후의 뒤안길(정순왕후)


한나라 왕비였던 여인의 한 서린 통곡이 백성들의 마음까지 울린 것일까. 정순왕후가 산봉우리레 올라 곡을 하면 민초들도 따라 울었고, 생계가 어려운 왕후를 위해 아낙들이 앞장서 채소와 과일을 사리문 안으로 넣어주었다고 한다. 정순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유독 백성들과 함께하는 것이 많다. 그도 그렇 것이 정순와우는 18세에 궁에서 쫓겨나 8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민가에서 살았다. 민가라고 하지만 허물어져가는  초막과 같은 집, 어쩌면 그녀의 생활도 초막처럼 누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뒤안길은 백성들이 따르고 애도했음으로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 지금도 서울 곳곳에는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정순왕후의 한 많은 세월은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시작된다. 영영 이별한 다리, 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가 채1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된다리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될 때 두 사람은 이 다리에서 이별을 했다고 한다. 이제나 저제나 뵈려나, 단종을 그리는 정순왕후의 애틋한 마음이 영도교라는 이름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홀로 민가로 들어갈 적에 정순왕후는 알았을까. 그것이 단종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는 것을.


이윽고 조용했던 초막에 쳥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단종이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민초들과 섞여 사는 남루한 삶에도 꺾이지 않았던 정순왕후의 꼿꼿함은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 한 많은 여인은 외롭고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또 애도하며 매일 같이 산봉우리 거북바위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똥쪽을 향해 구슬피 통곡했다. 그녀의 통고이 들려오면 마을 여인들도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함께 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녀가 매일 같이 올라 통고하던 산봉우리에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 많은 삶이 그녀로 하여금 쉽게 눈조차 감을 수 없도록 한 것일까. 단종이 죽고도 정순왕후는 64년을 더 살았다. 의지할 자식조차 없는 삶이었지만 마을 아낙들이 그녀를 살붙이처럼 보살폈다. 때로 음식을 날라주며 왕후를 보필했다고도 하고, 정순왕후를 위해 그녀가 사는 곳 주변에 채소시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순조 때 펴낸(한경자락)을 보면 동대문 밖 동묘 서남쪽에 한양에서 가장 큰 채소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독특한 점은 이 시장은 남자들이 드나들 수 없던 금남구역이었다는 것이다. 아낙들이 정순왕후를 돕는 것을 조정에서 알까봐 아예 남자들의 출입을 금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세조가 말년에 정순왕후에게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집과 식량을 주었지만 정순왕후는 그것을 고이 받아줄 여인이 아니었다. 생활고가 왕후로서의 자존감을, 쓸쓸히 죽은 남편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 된 자식의 한을 지울 수는 없는 일, 시녀들이 동냥한 음식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이었지만 정순왕후는 세조의 도움을 뿌리치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가 염색업을 했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다.


카다록에서~


사릉



사릉의 정자각



단종왕 후 정순왕후 사릉비각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