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남도

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_최익현선생 묘, 최익현선생 재실

기리여원 2021. 7. 6. 16:37

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 _ 최익현선생 묘 (崔益鉉先生 墓)

 

면  적 : 330㎡

지정일 : 1982.08.03

소재지 :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번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충신이었던 면암(勉菴) 최익현(1833∼1906) 선생의 묘소이다. 어렸을 때부터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대학자 이항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종 10년(1873)에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과 서원 철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3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관직생활에 대한 뜻을 접고 위정척사론자로서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 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 단발령 실시, 불법적인 을사조약 체결 등을 반대하는 상소를 통해 강력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면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1906년 제자 임병찬과 함께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침략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고, 일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숨을 거두었다.

 

선생의 묘는 1907년 충남 논산군 국도변에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1910년에 오지인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무덤 옆에는 이선근이 글을 짓고 김기승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최익현선생 묘 표지판

 

 

최익현선생 묘 표지석

 

 

최익현선생 묘 입구 홍살문

 

 

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勉菴崔益鉉先生春秋大義碑)

 

 

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勉菴崔益鉉先生春秋大義碑)

 

 

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 안내표지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5호 _ 예산 최익현선생 재실(禮山 崔益鉉先生 齋室)

 

- 최익현선생 묘소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1909년 논산에 있던 면암선생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할 때 민가를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함. 최익현선생재실은 살림집을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하였기 떄문에 건물의 배치는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배치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ㄱ’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ㄷ’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음.

 

- ‘ㄱ’자형의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고 안방의 전면으로 부엌 2칸을 돌출시켰으며 전면 2칸의 대청과 모서리 1칸의 마루를 중심에 두었으며, 서쪽에는 건넌방을 배치하였음. ‘-’자형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2칸의 큰 사랑방과 1칸의 작은사랑방을 배치하고 큰 사랑방의 측면에 누마루를 설치하였음.

 

- 최익현선생 재실은 전통가옥을 재실로 변환하여 사용하고 있는 예가 많지 않으며 건축구조와 양식적인 측면에서 조선후기의 건축사적 가치가 높아 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함.

 

 

예산 최익현선생 재실, 안채

 

‘ㄱ’자형의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고 안방의 전면으로 부엌 2칸을 돌출시켰으며 전면 2칸의 대청과 모서리 1칸의 마루를 중심에 두었으며, 서쪽에는 건넌방을 배치하였습니다.

 

예산 최익현선생 재실, 사랑채

 

 ‘-’자형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2칸의 큰 사랑방과 1칸의 작은사랑방을 배치하고 큰 사랑방의 측면에 누마루를 설치하였습니다.

 

최익현선생 묘 (崔益鉉先生 墓)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이었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묘입니다.

 

최익현선생 묘 (崔益鉉先生 墓)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 호는 면암이다.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고 서원을 철폐하자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일본과의 수호통상을 반대하다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879년 유배가 끝난 후에는 관직생활에 대한 뜻을 접고, 1906년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겼다. 의병을 이끌고 남원으로 진격하던 중 순창에서 체포, 일본 대마도에 유배되어 끝까지 항거하다 1906년 11월(음력)에 숨을 거두었다.

 

최익현이 순국한 후 묏자리를 바로 구하지 못해 1907년 4월에서야 노성(현 논산시 노성면)에 장사를 지냈고, 1909년 11월에 아들 최영조와 문인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무덤 입구에는 최익현의 뜻을 기리는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세워져 있다.

 

면암최선생익현지묘(勉菴崔先生益鉉之墓)

정부인청주한씨부좌(貞夫人淸州韓氏*祔左)

 

*부좌(祔左) : 남편과 아내를 합장(合葬) ,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최익현선생 묘 (崔益鉉先生 墓)

 

 

최익현선생 묘 (崔益鉉先生 墓)

 

 

 

▼ 1906년 6월 4일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면암 최익현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

 

무성서원은 1868년 정부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아니한 전국 47개 서원 중 전북도내 유일의 서원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둔헌(遯軒) 임병찬(林炳璨)선생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호남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

 

2021.06.27. 예산 광시면 관음리, 최익현선생 묘

글 문화재청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