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비지정문화재

강화 심도직물 터

기리여원 2022. 1. 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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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心都織物) 터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16번지

 

1947년 김재소(金在紹, 제7대 국회의원)가 설립하여 2005년까지 1200여 명의 근로자가 종사했던 국내 굴지의 주식회사 심도직물 터이다.

강화는 예로부터 부녀자를 중심으로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1920년대에 가내공업 형태의 직기가 도입되어 명직물과 견직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다. 1933년 강화에 최초로 근대식 방직 조양방직이 설립되었다.

1970년대부터 현대화된 공장으로 발전하여 대량생산체계와 수출산업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산업의 발달과 저가 중국산 면직물의 수입 등으로 섬유공업의 번영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곳은 2005년 강화군에서 소도읍 육성사업의 목적으로 용흥궁 공원을 조성하면서 심도직물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공장 굴뚝의 일부만 남아있어 당시 번창했던 강화경제의 명성을 말해주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심도직물의 유래

 

심도직물은 지난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로 60~70년대에 직원이 1,200명 정도 였고 거쳐간 사람들 수만해도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성기 시절 총자산이 87억원, 영간 매출이 61억 5천만원에 달했으며 인천의 대우자동차(현 GM대우) 같은 존재로 강화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심도직물을 중심으로 동광직물 · 이화직물 등 크고 작은 20여개 직물업체가 모여 있었다.

지역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심도직물은 당시 강화의 직물산업을 이끌어 가는 업체였다"며 "코오롱도 경쟁이 안될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현재 심도직물이 자리 잡았던 곳에 용흥궁 공원을 조성(2005.05.25~2008.05.30)하였고, 30미터에 달했던 거대한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심도직물(心都織物) 터 표지판

 

 

심도직물 터의 직조기

 

1970년도부터 강화군 양사면에 있는 "남경직물"  소창공장에서 현대까지 사용되어지던 소창을 생산하는 직조기다.

해사기에 감겨진 실을 나름하고 보빈감개에 감은 후 직조기에 장착하여 실을 직조하여 원단을 생산한다.

 

직조기

 

 

심도직물 터의 굴뚝

 

30m의 굴뚝 상단부분을 절단하여 기념으로 심도직물 터에 설치하였다.

 

심도직물 터의 굴뚝

 

 

심도직물 터의 굴뚝

 

 

심도직물 터의 굴뚝

 

 

심도직물 터의 굴뚝

 

2022.01.07. 금요일, 강화읍 관청리 심도직물 터

안내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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