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역사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곳, 사적 제225호_강화 초지진

기리여원 2022. 2. 12. 11:01

사적 제225호 _  강화 초지진 (江華 草芝鎭)

 

면  적 : 4,242㎡

지정일 : 1971.12.29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시   대 : 조선시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초지진 설치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강화 초지진 표지판

 

 

초지진 소나무

 

늘어지면서 삿갓모양으로 처져 아름다운 수형을 가지고 있으며 생육상태가 양호하다. 수려한 모양의 희귀 노거수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크며 역사 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이 나무들은 1656년 (효종 7년)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사적 제225호)을 설치할 때 초지돈대에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초지돈대는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측의 함포공격으로 일부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 운요호사건 당시 조선 수비병과 일본군 사이의 포격전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이 두 소나무에는 격전 중 날아온 포탄 파편에 의한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다. 열강의 침입에 맞서 장렬하게 싸운 선조들의 기상을 간직한 채 소나무는 400년 동안 초지돈대를 의연히 지키고 있다.

 

다음은 신미양요 당시 미군대령의 기록이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 슐레이대령

 

강화 초지진

 

 

400년 된 초지진 좌측 소나무

 

 

좌측 소나무

 

 

400년 된 초지진 우측 소나무

 

 

우측 소나무

 

 

초지진 소나무는 1870년대 전투 중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초지진 돈대 성벽

 

 

성벽에 포탄 맞은 흔적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벽과 초지진 소나무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

 

항쟁의 역사가 어린 마지막 보루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진에는 배 3척을 비롯하여 첨사 이하의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등이 배속되고, 초지돈 · 장자평돈 · 섬암돈의 세군데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병인 ·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근대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陸戰隊)가 초지진에 상륙을 감행하였다.

이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하여 파견한 운요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초지진 돈대 출입구 내부

 

 

강화 초지진 돈대

 

 

강화 초지진 돈대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 홍이포 

 

 

초지진 돈대 홍이포

 

 

강화 초지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강화 초지진에서 바라본 녹색등대

 

 

강화 초지진에서 바라본 갯벌

 

2022.02.06.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강화 초진진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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