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30호_강화 삼랑성, 양헌수 승전비

기리여원 2022. 2. 23. 11:03

사적 제130호 _ 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 , 남문

 

면  적 : 260,536㎡

지정일 : 1964.06.10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시   대 : 삼국시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 표지판

 

 

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 표지석

 

 

강화 삼랑성 남문 종해루(宗海樓)

 

전등사 삼랑성 남문인 종해루는 영조 15(1739)에 유수 권교가 수축하고 종해루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영조 40(1764)에 중수하고 정조 7(1783)에 유수 김노진이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1976년 남문을 중수하고 문루도 건립하였다.

 

강화 삼랑성 남문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사적 제130. 둘레 약 1.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 한다.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벽은 거친 할석으로 축조되어 있다. 1259(고종 46)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고종은 왕업을 연장하기 위해 성안에 가궐을 지었다.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의  남문 종해루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 동문

 

 

강화 삼랑성 동문

 

 

강화 삼랑성 동문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_ 양헌수 승전비 (梁憲洙 勝戰碑)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를 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프랑스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 시켰다가 밤에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4년(18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 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부총관·금위·어영 등을 거쳐 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비는 긴 직사각형으로, 윗변을 둥글게 다듬었다. 고종 10년(1873)에 세운 것으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양헌수 승전비 (梁憲洙 勝戰碑)

 

2022.02.13,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삼랑성(정족산성)

글 문화재청,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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